<시라트>

그 다리는 머리카락 한 가닥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롭다.

by 후기록

시라트 (2025)


<"죽음에 대해 가장 큰 착각은 그것이 '미래'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죽음은 이미 우리 등 뒤에 와 있으며, 우리는 단지 뒤돌아볼 권한이 없을 뿐이다.">

— 세네카 (Seneca)


세네카의 말이 무색하게 이 영화에 처음 개입하는 죽음은 '뒤돌아봄'에서 시작된다. 마치 오르페우스처럼. 이 정도의 지점에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등장인물들에게 충분한 감정을 주었다. 그들과 레이브 파티를 즐기며 영화 속으로 감응했고, 가진 건 없어도 공유하고 공존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응원하게 될 즈음이니, 바로 이지점에서 비극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루이스가 뒤를 돌아보자, 마치 죽음이 잡아당기듯 아들 에스테반이 협곡으로 끌려 내려간다.


어쩌면 단지 사고일 뿐인 일이다. 앞차의 바퀴가 빠지지 않았다면, 혹은 에스테반이 브레이크를 건들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루이스가 딸을 찾는 여정을 떠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러나 죽음 앞에서 '인간적인' 믿음들은 무용하다. ‘공간 안은 안전하다,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죽는다, 노력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세계의 질서는 갑자기 찾아온 죽음 앞에 무가치해진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가득 채워진 탄창의 권총이 단 한 번 발포된 것처럼, 분위기를 거칠게 반전시킨다. 다음 탄을 장전시키는 소리만을 남기며.


사실 세상은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었다.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고, 병든 자연 앞에서 생명 연장을 위해 서로의 땅을 탐한다. 정의가 아닌 힘의 법칙으로 단순화되어 가는 세상, 모두가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며 자존만을 챙기는 세상이 어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다시’라는 말로 과거로 회귀를 주장하는 것마저, 현재가 망가졌다는 반증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지긋지긋한 ‘어게인’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세상 속에서도 대안적 삶은 존재해 왔다. 경쟁이 전부인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시라트>의 레이브파티원들은 대부분 그렇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조차 의문인 사람들. 누구는 손이, 누구는 다리가 없이 주류에서 벗어난 거친 삶의 증거가 빼곡히 몸에 남은 사람들.


이런 망가진 세상의 <시라트> 속 레이브 파티원들과 루이스 부자가 맺는 관계는 자못 아름답다. 그들의 상호작용은 다분히 인간적이며, 영화는 이들 사이의 라포와 호혜성을 구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서로 베풀고 이해하며 도리를 쌓아가는 이 '작은 세계'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세계 밖에서는 종말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붕괴를 피하기 위해 우회한 산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가장 처참한 붕괴를 맞이한다.


사고 이후 슬픔은 전염된다. 에스테반의 상실을 마주한 파티원들은 ‘무아의 지경’만이 구원이 될 것이라 말한다. 무너지는 세상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의 신체뿐이라는 듯, 그들은 스피커를 세우고 약을 먹고 춤을 춘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유일한 출구인 양. 채 수습되지 않은 시신처럼 슬픔이 온전히 담길 새도 없이 음악이 울려 퍼진다.


”소리 높여! 날려 버려! “


그리고 자드가 지뢰를 밟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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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뭄바이>나 <시빌 워>가 공포와 전쟁을 체험케 했다면, <시라트>가 실감하게 하는 감각은 ‘종말’ 그 자체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세상 밖의 삶을 선택했더라도,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선택으로 내 삶은 무너진다. 부조리하다고 외쳐봐도 삶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살기를 재촉한다. 결국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을 뿐이다. 아니, 과연 살아남은 게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세상에선, 나는 그게 ‘좋았다’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시라트(Sirat)'는 이슬람교에서 지옥 위에 놓인,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다리를 뜻한다. 이 낙원의 다리를 건너기 위해선 반드시 지옥의 위를 지나가야만 한다.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한참이 지난 뒤, 차들이 일렬로 나란히 달릴 때 비로소 등장한다. 마치 이제야 '시라트'라는 다리에 올라섰다는 선포처럼. 안타깝게도 그들의 진행 방향은 지옥을 향한다. 루이스는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지옥을 향해야 하니까. 영화 초반 군대의 대열에서 벗어나 도망쳤던 이들은, 결국 영화 말미에 다른 슬픔을 짊어진 이들과 똑같이 기차라는 직선의 궤도에 올라 이동한다.


그 누구도,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은 자못 염세적인 시선을 종용한다. 하지만 단지 그 공포의 확산을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그런 악의로 가득 찬 영화는 어디에 존재의의가 있을까? 우리가 공포뒤에 느껴야 하는 건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괴롭지만, 다치지 않는 간접체험을 만들었을까. 멈춰야 할 때를 지났다고 한들, 속도를 줄인 채로 충돌이 난다면 피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순간도 늦지 않았다. 우리에게 필연의 죽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행동을 선택할 자유정도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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