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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하여.

<영원의 문>에 들어서다.

by 후기록

슬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요즘 그 슬픔이라는 것을 도저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슬픔에 ‘빠졌다’라고 해야 할까요. 이 표현에는 약간 어폐가 있다고 느껴지지만, 이 부분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써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미리 골라둔 <연인들>이라는 그림에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느끼는 것이 분명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든 감정은 슬픔이라는 고통에 압도당했을 뿐. 그래서 이 슬픔을 떨쳐내기 위해 다른 그림들을 찾아보다가, 결국 저는 더 큰 슬픔을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닿게 된 그림이 바로 <슬픔에 찬 노인: 영원의 문에서>였습니다.


사고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두 손을 움켜쥔 채 슬픔에 가득한 얼굴을 가리고 온몸으로 울먹이는 모습.
마치 죄수복 같은 파란 옷, 그리고 슬픔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따뜻하게 불타는 벽난로.

저는 이 그림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가려진 얼굴을 보며, 저 자신의 슬픔을 그 안에 대입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슬픔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보여주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슬픔을 가장 정확히 전달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슬픔 속에서 저는 위로감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저 노인 역시 ‘슬픔’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로는 어떤 위로보다도, 상대방이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언젠가 여느 누군가처럼, 제 슬픔에 자신의 나사가 맞지 않은 슬픔을 끼워 맞추려 하며 저를 구하려 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때마다 의문이 들곤 했습니다.


“당신의 슬픔이 나의 구명조끼가 될 수는 없는데.”
“아니, 애초에 나는 슬픔에 빠진 게 아닌데.”

슬픔이란 것이 왜 외부에서 차올라 나를 잠기게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걸까요? 슬픔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필요로 하는 위로란 구명조끼가 아니라, 누군가가 내 마음의 수도꼭지를 틀어주는 것이 아닐까요?
슬픔이 넘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어쩌면 눈물이란, 발끝에서부터 눈까지 슬픔이 차오른 뒤에야 쏟아져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팽팽히 차올라 더는 담을 수 없을 때 비로소 흘러넘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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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왜 <영원의 문>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됩니다. 영원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최근 저는 인간이 어쩌면 <기본적으로 슬픈 존재> 일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독립된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그 고독은 슬픔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지입니다. 그리고 이 슬픔은 우리가 육체를 고집하는 한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며 마음속 저항감이 스멀거리지만, 그것을 억누르며 생각을 계속합니다.

‘고독하지 않다’ 혹은 ‘슬프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극히 드문 경우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곧 그 사람의 영원함이라면, 그 생애를 무한히 확장하여 하나의 우주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은 하나의 우주이며, 이 거대한 우주 속 작은 소우주들이 충돌해 일어나는 사랑과 싸움,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은 계산조차 불가능한 불가해한 확률의 찰나의 기적일 것입니다.


찰나의 사건들이 기록되어 슬픔이라는 캔버스에 남겨진 것, 그것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일지 모릅니다. 찰나의 기쁨, 찰나의 사랑, 찰나의 분노가 우리 개별적인 영원 사이에서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일지도 모릅니다.

슬픔을 제외한 모든 감정이 찰나라는 점에서 저는 <영원의 문>을 떠올립니다.
있음은 없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했던가요. 우리는 그 찰나의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없는 상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슬픔은 결국 영원이 되는 것 아닐까요?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잃는 일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고들 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영원한 슬픔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이든 고통이든, 그것이 찰나라면 우리는 그 순간을 지나 다시 영원 앞에 서야 합니다.
<영원의 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슬픔을 채워가야 할 운명에 놓입니다. 이 문을 지나 다음 문을 열 때까지, 우리는 서로 다른 우주와의 충돌이라는 기적을 꿈꾸며 나아가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나도, 당신도 말입니다.

영원 같은 슬픔을 생각합니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이미 흘러가 버린 슬픔을 다시 주워 담습니다. 슬픔이 당연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니, 그저 그대로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구원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너무 성급하게 슬픔을 지워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이제는 말합니다.


“그것들은 그렇게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조금 더 슬프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울 테니, 당신은 눈물을 참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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