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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 반에 떠오른 생각

두 시인의 양심선언에 기대어

by 이에누

아침 여덟 시에 집을 나와 당구동호회로 간다.
한 달에 오만 원 내고 월, 수, 금 하루 네 시간 시간 죽이는 놀이터다.
다섯 판을 치고 나니 어느새 열두 시.
집에서 기다릴 아내 생각이 문득 난다.
동네 ‘골목냉면’ 집의 인기 메뉴인 웰빙비빔밥을 사갈까 물어보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질 않는다.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스친다.
왜일까?

나만 놀다 들어가 미안한 마음일까?
아내가 집에 없어서 고맙기도 하다.
집에 가면 라면이라도 끓여야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먹는 라면은 쓸쓸하지 않다. 소주 한잔 곁들이는 그 맛을 아내가 있을 때는 감히 상상도 못 한다.

마트로 소주를 사러 가는 길, 전화가 울린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친구다.
자기 동네 맛집을 알아냈다며 그리로 오란다.
버스로 10분이면 갈 거리지만 굳이 지하철 두 번을 갈아탄다.
지공거사의 우직하지만 경제적인 이동방편이다.

아마도, 아내는 동네 아줌마나 친구랑 어디서 수다 떨고 있겠지.
은퇴한 백수 남자도 방앗간이 필요하다.
참새가 쭉정이를 쪼듯이, 입방아 찧는 곳.
오전의 방앗간은 당구장이었고,
이제 나는 이차 방앗간으로 간다.

친구의 맛집은 강동구 명일동의 김치찌개집.
돼지고기 뭉탱이가 푸짐하고 묵은지에 대파, 청양고추가 목구멍을 찌른다.
출출한 배에 폭포처럼 막걸리가 흘러든다.
막걸리 세 병, 소주 한 병으로 입가심.
했든 말 또 하고 들은 말 또 듣는, 맥락도 경계도 없는 아무말 대잔치가 두 시간은 족히 간다.

“당구는 좀 늘었어?”
그 말에 눈으로 보여주고 싶어 삼차 방앗간, 다시 당구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취중 당구가 될 리가 있나.
시계는 어느새 네 시를 넘긴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오후 네 시 반의 마누라는 공포다.
아파트 철문을 열고 내가 먼저 들어서야 한다.
그래야 ‘징하게 놀다 오시네’라는 말을 면할 수 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미안해요. 내가 늦었네.’
그 한마디를 듣고 싶다.




문과라서 죄송한, 문과중년 시인이 블로그에 올린 시가 떠오른다.
그의 마음도 나와 같을까?


〈아내새〉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동그란 얼굴
순한 눈의
아내새가 날개를 접고
힘든 다리 종종거리며
집에 들기 전에

나는 모이 없는 집이라도
지키고 있어야 한다

아내새는
사람의 형상을 본떠 만든
하나님이다


페이스북에서 인연이 닿은 김수 시인의 시집에도 아내에 대한 연민이 그득하다.


〈한울님〉

오늘
이른 아침
아내 출근길,

뒷모습 바라보며
하얀 마음에
은은한 그리움으로
남몰래 쓴다

‘아내는 한울님이다.’




이선구 시인도 김수 시인도, 그리고 나 역시
열심히 살았지만 늘 아내에게 미안했던 사람들이다.


김수 시인은 젊은 시절부터 노동·농민·평화운동에 앞장섰고, 병마와 싸우며 몇 번이나 삶의 경계를 넘나들었다고 한다.
평생 삶은 치열했지만 살림은 가난했을 것이다.
고단한 삶을 견디며 시의 길로 들어선 지 40년 만에 첫 시집을 냈다.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끝내 미안하다 말하지 못했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이 좋아하는 무등산을 바라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곳이냐며, 말하는 당신의 위로


‘남들처럼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하고’
‘세상살이 중요하다며 밖으로만 눈 돌리던 무능력자’의 고백.

병고를 이겨내고 ‘고요의 집 한 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부인을 ‘한울님’이라 부른다.

그럴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가볍게 발설할 언어가 아니다.
평생 가슴속에 묵히고 삭히고 되새기다 끝내 목울대를 넘어서지 못한 양심선언일 수 있다.
그래서 시가 되었을 것이다.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도 그랬다.
“미안허다.”
단 네 글자 속에 한 생애가 요약되었다.
김훈은 그 말을 두고
“후회와 반성의 진정성은 느껴지지만, 좋은 유언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고, 대책 없이 슬프며,
허허로워서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반면 김용택의 아버지는 달랐다.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드려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고 따뜻한 유언이었다.

그래서일까.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임시방편으로 툭 내뱉는 ‘미안’의 경박함을 우리는 안다.
끝내 아껴둔 그 말의 천금 같은 무게를
아내들은 이미 알고 있다.

당신들의 시 속에서
그 말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아우성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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