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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익장의 이름값

큐 끝에서 배우는 삶의 리듬

by 이에누

낮은 천장 아래, 조용한 당구장의 공기에는 시간조차 느릿하게 흐른다. 그가 큐를 잡고 공을 응시하는 순간, 정지한 듯한 공기 속에서 작은 떨림이 교차한다. 초록대 위에서 공 하나가 천천히 굴러가는 동안, 그는 오랜 세월 쌓인 집중력과 체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7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손과 눈, 몸의 움직임에는 단단한 리듬이 박혀 있다.




그를 처음 본 건 오래된 동네 당구장의 이른 아침이었다. 어스름한 볕이 반쯤 닿는 창가 근처 4번대, 녹색 카펫 위로 공이 ‘탁, 탁’ 부딪히는 묵직한 울림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저 동호회원 중 하나였고, 그는 이미 몇 년째 꾸준히 당구를 갈아온 중견급 플레이어였다.

처음 들은 정보는 단순했다.

“4구 300 치는 어르신이야.”

그러나 실제로 마주하니 숫자가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고 차분하며, 승부욕이 반짝이는 순간에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 그 모든 것이 그의 샷 한 번, 한 번에 녹아 있었다.


막상 맞붙어보니 그 스코어가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 무엇보다도 한 번 얻어걸린 운수 따위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오래 작업해 온 장인의 침착함 같은 게 배어 있었다.

가볍게 웃다가도 큐를 잡는 순간 달라졌다.

마치 체온이 확 내려가는 느낌.

볼 앞에 서면, 그는 ‘70대 중반’이라는 나이를 벗어던지고 그냥 한 명의 경쟁자가 됐다.




요즘 당구 동호회에는 60대, 70대의 ‘취미 입문자’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그들과 시작부터 달랐다. 구청 복지관에서 다진 기본기와 몸의 리듬, 쌓인 경험이 만들어낸 집중력은 누구보다 날카로웠다. 단순히 ‘잘 치는 노인’이 아니라, 시간이 그를 다듬어준 선수였다.


동호회에서 그는 빠르게 ‘신뢰의 기준’이 되었다.

동호회장배, 송파구 당구연맹 회장배, 구청장배, 서울시 아마추어 대회까지.

승승장구하며 기어이 준우승에까지 올랐다.

모두가 그의 체력과 끈기를 존중했다.

그가 4구에서 800점에 가까운 실력을 갖춘 것은 단순히 기술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집념과 반복, 그리고 오랜 시간 쌓인 경험이 만들어낸 결정체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만하지 않았다.

동호회원들과 3쿠션 게임을 할 때는 500점 정도를 놓고 친다.

“젊은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그의 유머 섞인 배려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한 게임 한 게임, 그는 자신의 몸과 감각을 시험하고, 경계하며, 조금씩 완성해 간다.


당구장은 그에게 단순한 취미의 공간이 아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소음과 커피 향, 삼색 공이 굴러가는 소리가 뒤섞이지만, 그는 그 속에서도 고요하게 자신만의 흐름을 만든다.

큐를 잡는 순간, 그는 마치 글을 쓰는 작가처럼 몰입한다.

한 샷, 한 샷을 보내며 다음 공의 위치와 각도를 계산하고, 손끝의 떨림을 느낀다.

정확한 순간의 호흡과 신체 감각이 맞물려 그의 경기는 완벽하게 연주되는 듯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문득 깨닫는다.

글쓰기와 당구는 다르지 않다.

손끝과 눈, 생각과 판단이 맞물리는 순간, 한 샷은 한 문장과 같고, 한 게임은 한 편의 글과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승패보다 중요한 건 리듬과 집중,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가끔은 경기에 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패배에는 흔적이 없다.

뒤끝 없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승자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승부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 자체를 즐기는 태도다.

그 모습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묘한 울림을 준다.

“나이 들었다고 약해지는 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노익장이라는 말의 무게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는 경기 후에도 쉬지 않고 연습한다.

혼자 남아 공을 정리하고, 각도를 계산하며, 작은 실수 하나에도 집중한다.

그 순간의 그의 표정과 손끝은 모든 승부의 결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집요함, 체력, 침착함, 그리고 작은 기쁨.

그가 당구장에서 찾는 건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시간과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다.


그에게 몇 번이나 지고 난 뒤, 나는 속으로 계속 물었다.

“왜 저렇게까지 강하지?”

기술, 경험, 성격, 어느 하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게감이었다. 어느 날 경기 중 잠깐 쉬는 타임, 그는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난 뒤져도 앞돌리기를 먼저 본다니까.”

농담 반 같지만, 진심이었다. 지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기는 방식 자체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 자세와 구질 하나하나에 자신만의 방식이 녹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그의 시합을 마치 영화처럼 슬로모션으로 관찰한다.


동호회장배 결승.

관중들의 숨죽인 시선 속에서 큐를 잡는 그의 손끝이 살짝 떨린다. 공 앞에 서서 시야를 스캔하고, 머릿속으로 다음 포지션을 계산한다. 큐 끝이 공을 스치며 나오는 탁, 탁, 탁 하는 충돌음이 공간을 울린다. 공이 굴러가는 순간, 테이블 위로 전해지는 진동이 손끝까지 느껴진다. 관중석에서는 숨죽였던 공기가 터져 나와 “와…”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조용히 다음 샷을 준비한다.


승리는 곧 송파구 당구연맹 회장배로 이어졌다. 젊은 선수들이 빠른 스피드로 몰아붙였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차분히 샷을 이어가며 상대가 놓친 틈을 하나씩 포착했다. 마지막 1점, 큐 끝에서 공이 정확히 목적구를 향해 갈 때 관중석에서는 감탄과 탄성이 동시에 터졌다. 우승.


구청장배, 서울시 아마추어 대회까지. 매 경기마다 긴장과 압박이 더해졌지만, 그는 단단했다. 결국 서울시 아마추어 대회 준우승. 사람들은 말했다.

“저 분은 그냥 ‘노익장’이 아니라 선수지.”

“근데 선수 같으면서도 선수 같지 않다.”


승부욕은 날카로웠지만, 경기 후 말들은 소박했다.


“잘 맞았어요. 오늘은.”

“운이 좀 좋았네.”


승리의 순간, 그는 조용히 웃는다.

패배의 순간에도 흔적이 없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점수가 아니라 흐름, 과정, 그리고 몰입이다.

과장하지도, 포장하지도 않았다. 소박함이 오히려 존중을 더 크게 만들었다.


“800 치는 분”이라는 말은 단순한 기술 수준이 아니라, 몸의 균형, 샷 속도, 당점, 다음 볼을 예측하는 시야까지 모두 하나의 체계처럼 움직여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3쿠션 게임에서는 500점씩 놓고 치며, 스스로 핸디캡 같은 벽을 설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자신을 시험하며 경계를 확장한다.




당구장에 들어서면, 그는 꼭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본다. 무심해 보이는 행동 같지만, 그날 컨디션을 가늠하는 루틴이다. 공을 닦는 손길, 큐를 고르는 순간, 샷을 놓는 미세한 멈춤과 심호흡 없는 공기 흡입, 팔꿈치 각도까지—모두 근육 기억과 집중력의 결정체였다.


연습 시간, 오랜동안 몸에 밴 루틴을 실행한다. 공 하나하나를 놓고 큐 끝으로 미세하게 밀며, 포지션과 각도를 다시 확인한다. 큐가 공에 닿는 소리는 작지만 또렷하게 울린다. 팔과 어깨, 손목까지 이어지는 움직임은 마치 연주자의 손끝처럼 정밀하다. 햇살이 창가를 스치며 테이블 위 공의 그림자를 길게 만든다. 공이 굴러가며 다른 공과 부딪히는 소리, 쿠션 코너에 닿는 묵직한 느낌, 그리고 자신의 호흡이 뒤섞여 하나의 리듬을 만든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줄 필요 없는 집중과 몰입이 배어 있다.


그의 하루 루틴은 묘하게 규칙적이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살짝 놀라게 한다.


• 오전 8시: 당구장 문을 열고, 공을 정리한다. 볼 표면을 닦고 큐의 끝을 점검하는 일련의 동작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의 컨디션을 가늠하는 ‘전투 전 의식’이다.


• 8시 10분: 몇 게임의 연습 샷. 정확도를 확인하고, 감각을 깨운다.


• 8시 30분~10시: 동호회원들과 한두 게임. 여기서 그는 승패보다는 게임 자체의 흐름을 즐긴다.


• 10시~12시: 개인 연습. 공 하나를 목표점에 놓고, 큐 끝에서 몸과 손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 오후 1시~2시: 시합 준비와 미니 대결. 다른 회원들과 작은 내기를 걸기도 하지만, 패배해도 뒤끝이 없다.


• 오후 2시 이후: 공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무리. 그때 그는 누구에게 보여줄 필요 없이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작은 루틴 속에서 그는 당구장, 운동장, 사색의 방, 작은 전쟁터를 동시에 경험한다.

한 샷, 한 샷이 곧 집중과 몰입의 기록이고, 시간을 다루는 기술을 몸에 새기는 행위다.




그를 보면, 나이를 먹는다고 약해지는 것이 아님을 자주 느낀다. 어떤 사람은 나이 들수록 더 단단해지고 정교해진다. 그 단단함은 근육이 아니라 태도에서 온다. 손끝을 다루는 정성, 패배를 받아들이는 방식, 작은 실수에도 표정을 정리하는 절제력.


그는 종종 말한다.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게 있잖아. 난 그게 좋더라.”


가벼운 말 같지만,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다.


나는 그의 하루를 관찰하며 글을 쓴다. 한 샷, 한 호흡, 한 움직임이 내 글의 리듬을 깨우고, 삶의 속도를 조절하는 법을 가르친다. 승패보다 중요한 건 흘러가게 두는 것, 속도보다 중요한 건 정확한 호흡, 힘보다 중요한 건 집중과 감각이다.


늦은 오후, 초록대 위를 굴러가는 공처럼 내 문장도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흘러간다. 나는 깨닫는다. 나이 들어도 삶은 충분히 아름답고, 리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샷 하나하나는 단순한 공 놀이가 아니라 시간과 자신을 다루는 법을 보여주는 작은 교본이다.


마지막 샷이 쓰리 쿠션의 마법으로 끝날 때, 나는 다시 떠올린다.

단순한 연륜이나 기술을 넘어, 삶의 속도와 시간을 다루는 태도, 끝까지 몰입하는 힘. 그것이 바로 그의 진짜 실력임을, 나는 초록대 위에서 배운다.





※ 이 글은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거주하는 정** 당구 애호가 (74)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입니다.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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