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머스캣 농사꾼, 3년의 기록
겨울 초입, 페이스북에 낯선 광경이 눈에 띈다. 문경 친구가 올린 사진. 핑크색 상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정갈하게 자리잡은 샤인머스캣 속포장. 며칠 전 고교 동창 단톡방에서도 보긴 했다. 산행 행사에 찬조한 그의 작품이지만 이번엔 규모가 다르다. 무려 수출품!
작년 겨울, 농막에서 뜨거운 차를 내어주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올해는 진짜 잘 될랑가 몰라.”
하우스 안팎의 온도를 맞추느라, 웃는 표정이었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던 친구의 손과 눈빛. 장작 타는 냄새, 얼어붙은 고무장화, 비닐하우스 안팎에 널려 있던 농기구들.
1년 사이, 그가 어떤 계절을 견뎌왔는지가 한눈에 느껴졌다.
이 글도 쓸 겸,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 싶은 마음에 간단한 기록이나 초안 같은 거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몇 상자 주문하겠다고도 했다.
스마트스토어 개설했으니 그쪽에서 주문하라는 답만 오고, 이메일은 열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매일경제 부장까지 한 언론인이고, 글은 누구보다 잘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생색내기나 공치사는 질색하는 성격을 아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그냥 내 깜냥과 상상으로 그가 말하지 않은 1년을 대신 기록해 본다. 농사꾼의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긴 작은 기적을.
어쩔 수가 없다. 이 글은 다큐보다는 조금 픽션에 가까운 모양새를 띨 것이다.
봄바람이 채 따뜻해지기 전에, 문경 산자락에는 기이한 우박이 내렸다.
단 20분, 그러나 농부에게는 겨울만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비닐하우스 한쪽이 너덜해지고, 샤인머스캣 어린 순들은 비틀린 채 서 있었다.
그날 저녁, 그는 망가진 비닐막을 고치며 중얼거렸다.
“농사는 참… 내가 농사를 짓는 건지, 농사가 나를 짓는 건지 모르겠다.”
순 지르기 일정은 통째로 뒤집혔다. 이른 봄의 작은 차이가 여름의 송이 모양을 결정한다. 그는 묵묵히 다시 계획을 세웠다.
하루는 새벽에 시작된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비닐, 그것이 그의 알람이다.
손전등을 들고 잎사귀 하나하나를 살피며, 습기와 바람, 반점까지 기록한다.
농부라기보다 연구자, 때로는 예술가처럼.
팬과 히터, 습도계와 온도계를 체크하며 밤새 뛰어다니고, 송이가 젖지 않도록 바람길을 열고, 팬을 켰다 끄며 숨도 제대로 못 쉴 때가 많다.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지.”
그가 했던 말 그대로, 여름 내내 지켜내는 농사였다.
아침 식탁은 늘 간결하다.
즉석밥 하나, 김 두 장, 달걀프라이 하나.
농사는 거창하게 시작해도
결국 이렇게 현실적인 자리로 돌아온다.
아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보… 이게 정말 돈이 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숟가락만 조금 더 천천히 들었다.
그 침묵은 오래 남았다.
아내의 걱정도, 가족들의 묵묵한 인내도,
그 모두가 그의 하루 위에 조금씩 쌓여갔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 하우스로 걸어 나갔다.
돌아가지도, 피하지도 않으면서.
봄이 오면 농부들은 씨앗보다 먼저 영수증과 만난다.
비닐값은 두 배 가까이 뛰었고 비료값도 하늘로 솟았다.
친구는 말없이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말했다.
“카드값은… 이번 달도 안 본다.”
아내는 말없이 설거지를 마저 했다.
그 조용한 움직임도 농부의 경영 일지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처음 그가 샤인머스캣과 사과대추 농사를 한다고 했을 때 나는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손도 많이 가고 까다롭고 초기 비용은 산 하나를 옮겨놓은 듯한 품종.
“왠지, 이걸로 승부 보고 싶더라.
농사도 인생도 한 번쯤은 제대로 걸어보고 싶잖아.”
그 말에 나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제대로 걸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가파른 길이었다.
친구는 짧게라도 기록을 남긴다. 페이스북에서 건져낸 글들을 옮겨본다.
포도나무에도 순이 돋기 시작했다.
2024. 04. 21.
지난해 봄에 묘목을 심어 처음으로 포도 수확. 2024.10.24.
산은 점점 녹음이 짙어지고, 포도싹은 송이를 머금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2025. 06. 13
내 포도밭 위로 쌍무지개가 떠올랐다.
조만간 좋은 일이 있으려나...
2025. 08. 15.
날씨가 서늘해졌다. 포도밭 청개구리 겨울나기가 벌써 걱정이다. 포도나무 심어 3년 만에 첫 수확을 앞두고 나름 품위가 좋아서 수출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2025. 10. 20
이 일지는 노동의 기록이면서 한 농부가 자기 마음을 붙잡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 그가 왜 ‘농부이면서 시인’이라는 말을 듣는지 알 것 같다.
장마가 길어지면, 샤인머스캣은 물에 예민하다. 송이 사이 곰팡이, 알 터짐, 병충해가 농부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즉시 살충제를 준비했지만, 이웃 농부는 말렸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해. 지금 치면 약해질 수 있어.”
논쟁이 이어졌다. 분사 각도, 희석 비율, 도포 시간.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두 농부는 학자처럼 계산했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몇 줄은 잃었지만, 남은 줄은 더 강하게 살아남았다.
비를 많이 먹은 포도는 크지만 단단함을 잃는다. 그는 송이마다 알을 덜어냈다.
마치 아까운 시간을 뜯어내듯, 한 송이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작업.
‘이걸 다 떼면 올해 수익은…’ 마음속 계산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품질을 선택했다.
가을 햇살이 달라지기 시작하면, 샤인머스캣 연녹색이 다시 빛난다.
첫 송이를 땄을 때, 송이는 작았지만 알 하나하나의 밀도는 높았다.
비와 장마에도 찢기지 않고, 습기에도 상하지 않았다.
농부의 손과 마음이 만든 기적이었다. 포도알 하나하나가 1년의 고단함과 기다림을 담았다.
수확 직전의 포도는 물 한 방울에도 당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하필 그때 기상청이 폭우를 예보했다.
친구는 그날 하늘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문경의 바람이 평소보다 눅눅했다.
기적처럼, 비는 ‘그 하루만’ 비껴갔다.
밤늦게 도착한 메시지.
“주문합니다.”
그 한 줄 안에는 안도의 숨과 피로와 감사가 조용히 겹쳐 있었을 것이다.
농협 직원은 몇 알을 맛보더니 말했다.
“당도 좋네요. 이건 수출도 가능합니다.”
그 한마디는 1년 동안 그의 허리를 눌러왔던 무게를 조금 들어 올렸다.
노래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달디 달디 달디 단 샤이니 ~~"
며칠 뒤, 페이스북에 사진이 올라왔다.
포도 상자, 녹색 스티커,
그리고 첫 수출.
첫 수출 소식은 짧았다. 페이스북에 세 글자, ‘첫 수출’.
늘 그랬듯, 그는 자랑하지 않았다.
땅이 가르쳐준 ‘가늘게, 그러나 길게 버티는 법’을 실천했을 뿐이다.
나는 그 글을 보며 작년 농막에서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버티는 동안 자란다니까.”
포도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결국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얼어붙은 손을 비비던 그의 얼굴이 그 위에 겹쳐 보였다.
우박을 견디고, 장마를 넘기고, 알을 솎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한 송이를 세계로 보냈다.
드라마 같은 성공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조용한 승리.
문경 농막에서 마신 뜨끈한 유자차 향이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다. 그 겨울, 그는 이미 다음 해의 ‘첫 수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땀은 반드시 자리를 찾는다. 그의 샤인머스캣이 1년 만에 증명했다.
(후일담)
농사짓고 관리하고 수확하고, 마침내 판매와 수출까지 정신없이 3~4년을 보내고 맞은 잠시의 휴식.
하지만 요즘 그는 또다시 바쁘다.
밤을 새워 만든 스마트스토어 주소를 지인과 고객에게 보내고, 아침 일찍 들에 나가 일하다가, 작업동에서 아침밥을 챙기고, 해질 때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와 저녁 한 술 먹고 곯아떨어지는 생활.
여기에 온라인 가게 운영까지 더했으니, 오죽 바빴겠는가?
그 와중에 유기농기능사 2차 실기시험을 치렀고, 다음 주에는 농기계운전정비기능사 2차 실기시험 예정.
수요일에는 농민사관학교 수업 참석, 주문 들어온 물건 포장 후 우체국 발송.
지난 일요일까지 나무에 달린 포도를 모두 따서 작업동에 쌓아놓았고, 오늘은 산더미처럼 쌓인 포도를 선별해 저온창고에 쟁여 넣었다.
그런 와중에 내 원고 요청을 떠올리고 문자를 보내왔다.
맞은편에 앉아 일을 거들던 부인이 핸드폰만 들여다본다고 잔소리를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별 내용은 없다.
나는 그의 모든 순간을 아는 게 아니다.
이 글의 절반은 그의 말에서 왔고
또 절반은 내가 지켜본 기억과
상상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상상으로 쓴 부분이라고 해서
현실보다 과장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농부의 현실은
어떤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어떤 영화보다 더 날카롭고,
어떤 기록보다 더 깊다.
샤인머스캣의 일 년은
그런 현실을 땅 위에 그대로 새긴
한 권의 책 같은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
그 책의 다음 장이
나는 궁금해진다.
※ 이 글은 문경시 점촌읍에 거주하는 남** 샤인머스캣 영농인 (67)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입니다.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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