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자리엔 미녀가 앉아 있고...
청주에서 대구 가는 길에 설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별 수 없이 하는 일상적 여행일 뿐이었다. 일주일간의 BOQ(미혼장교 숙소) 생활을 벗어나 영외로 나간다는 의미뿐.
대구 집에서 주말을 지내고 다시 일요일에 들어오는 루틴을 실행하기 위해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을 뿐이다.
애인이나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여행에는 설렘이나 기대 같은 감정도 따라나섰겠지.
가난한 집의 맏아들이라는 삶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객지 부대생활.
청주 비행장이 있는 공군부대 인사처에서 중위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전에서 공군장교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 첫 이년은 대구 군수사령부 예하 부대인 물자동원부와 보급창이라는 이름의 부대에서 근무했다.
집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따분한 군대생활이었다.
말이 장교이지, 나는 당시 멋지거나 위풍당당하거나 설렘을 유발하는 청년은 아니었다.
대학 생활 내내 스트레스와 쇄약함에 시달리다 억지로 체중을 늘리고, 도피처로 선택한 군 입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출퇴근도 군대 생활스럽지 않았다. 멋진 연애도 찾아오지 않았다. 군대도 직장생활이었다.
직무에 대한 강박증, 소심하게 상관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범생이 생활.
동기들 중 누구는 미팅을 하며 예쁜 아가씨를 만나고, 누구는 근무처의 군무원과 썸을 타고, 레이다 기지가 있는 사이트 근무 동기는 하숙집 주인 딸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이르렀다는 풍문도 들렸다.
그런 찬스도 없었고 선택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가씨들의 눈에도 나 같은 약골 소위는 눈에 안 들어왔을 것이다.
행정장교 사무실에는 타자수를 겸한 여비서가 있었다. 미모의 군무원. 내가 기안한 공문을 타이핑해서 가져올 때마다,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개인적인 대화도 없었다. 얼굴만 붉히며, 아무 일 없이 이년이 지나갔다.
청주에서는 영내 장교숙소에서 숙식하고 인사처 근무를 했다.
가끔 재미도 있었다.
보안부대 대위였던 고교 3년 선배와 동거하며, 당시 십만 원 조금 넘는 월급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술값으로 탕진되었다.
간혹 아가씨가 나오는 찐한 주점에서 회포를 풀고, 팁으로 소진했다.
선배는 주말이면 거의 외박. 상대가 애인이었는지 술집 아가씨였는지는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간혹 그런 자리로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애써 피하지는 않았다.
진짜 재미는 동거 파트너가 바뀌고 나서였다.
이년 늦게 입대한 신입 소위가 룸메이트였다.
그런데 엄청난 인물. 무려 공군 참모차장의 아들이었다. 생김새도 좋고 성격도 곰살맞아, 선배 모시기에는 극진했다. 황송할 정도였다.
선배가 주선하는 술자리보다, 그 후배가 마련한 귀여운 주말 데이트가 내겐 맞춤형 즐거움이었다.
주말 오후, 녀석이 타고 다니는 스쿠터에 함께 타고 청주 시내를 달리는 짜릿한 쾌감도 있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주말 오후를 숙소에서 빈둥거릴 리가 없었다. 후배가 외박을 나가면 스쿠터는 내 차지였다. 기지 외곽에서 확실히 운전을 배우고, 무심천 주변과 대청호 근처 가도를 질주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여자 없는 군인이었다. 후배는 애인과 주말을 보내고, 나는 그 녀석의 애마인 스쿠터를 탔다.
다시 대구 가는 고속버스 안.
내 옆자리에 20대 초반의 예쁜 아가씨가 앉았다. 솔직히, 이런 행운은 설렘을 불러왔다.
하지만 말을 걸려고 하면 말이 잘 안 나온다.
말머리가 허공에서 흩어지고, 생각만 굴러다녔다. 이런저런 공상, 망상만 하다 시간이 흘렀다.
어둑어둑 밤이 찾아왔다. 차창 밖은 어둠에 잠기고 실내등도 꺼졌다. 맹숭맹숭한 어둠 속에 사람들은 하나둘 잠들었지만 나는 눈이 말똥말똥했다. 옆에 이런 미모의 여인이 있으니 잠들기엔 아깝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30분 정도 헛생각만 하고 있는데, 아가씨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날따라 나는 사복이 아닌 제복 차림이었다. 숙맥 같은 청년 장교에 대한 조심스러운 관심의 몸짓일까. 아니면 차와 함께 그냥 흔들린 건가?
반응을 보여야 할까? 대화보다 몸의 움직임이 먼저인 이 상황은 어색했다. 빨리 중간 휴게소에서 차가 서야 이 미묘한 긴장과 위기를 벗어날 텐데. 두 시간 반의 여정에서 선산 휴게소는 최소 한 시간은 더 가야 한다.
식은땀이 나고 체온이 식어간다. 기분탓인지 옆자리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여인에게서 전해져 오는 체온 때문일까? 상대적 온도차일까?
움직임이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 비틀기가 점점 과감해지고, 다리가 살짝 스치기도 했다. 오분 간격에서 삼분, 이분, 일분.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어깨가 닿는 찰나의 순간… 은근한 긴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차 안은 코 고는 소리와 잔기침, 시트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뿐이었지만 우리 둘 사이엔 말 없는 ‘접촉전’이 조용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다음은 손일까? 이러다 가슴이 닿으면 어쩌나?
내 잘못이 크다. 대화도 안 걸고…
슬쩍 스킨십이라도 하는 게 이런 시간, 이런 조명, 이런 분위기에서는 적절하고도 은밀한 차내 에티켓 아닐까?
잠시 후, 아가씨가 내 팔을 살짝 툭 쳤다.
심장이 순간 내려앉았다가 다시 치솟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군인 아저씨.”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 <오후에 다가온 낯선 사람들> 시리즈가 잠시 옆길로 샙니다. '오후에 떠오른 낯선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두 편에 걸쳐 몇십 년 전의 추억을 소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