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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었다!

옷깃만 스쳤을 뿐...

by 이에누

(전 편에 이어서...)

"저기요… 군인 아저씨…"

나는 얼어붙은 채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희미한 안전등 불빛 아래서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오해가 단숨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내 쪽으로 기울어지던 몸, 균형 잡으려는 팔꿈치, 다리의 움직임, 잦아지는 호흡.
내가 혼자 설레발 치며 로맨스의 신호라고 착각하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단순한 생리적 한계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이 뒷머리를 때렸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한데… 너무 아파서… 잠깐…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모든 미묘한 움직임에 의미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일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이 조용하던 여정이 이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기묘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배를 움켜쥔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나는 순간 상황을 판단했다. 선산 휴게소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그런데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듯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사님께 말씀드려 일시 정차하게 해 드리죠."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녀가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벌어질 상황을 상상했다.
버스가 갓길에 멈추고 그녀는 거의 뛰듯 내릴 것이다. 혼자 두면 위험할 것 같아 나도 따라 내려야겠지. 어둡고 습기 찬 작은 가건물 쪽으로 안내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사람 그림자는 없을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앉아 한숨을 내쉰다. 나는 뒤에서 시선을 경계하며 주변을 살핀다.
그때, 멀리서 버스 엔진 소리가 사라진다.
버스는 시간 때문에 그대로 떠나버릴 것이다.

"버스… 가버렸네요."
"네? 뭐… 어쩌죠?"
둘 다 황당함에 웃음을 터뜨린다.
배 아파 주저앉은 그녀를 보며 나는 손을 살짝 어깨에 올린다.
"괜찮아요. 여기서 안전하게 있으면 돼요. 잠깐만, 제가 주변 정리할게요."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밤길, 바람, 풀잎 소리. 긴장감과 민망함, 그리고 웃음과 설렘이 뒤섞인다.
길이 좁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어깨가 스치고, 손끝이 닿고... 조금 전까지의 민망함과 긴장은 어느새 웃음과 설렘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상상과 공상, 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옆자리의 그녀는 현실이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숨을 고르기조차 힘겨워 보였다. 배탈일 거라는 짐작은 완전히 빗나간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석으로 향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은 기사님뿐이었다.

"승객 분이 위급해 보입니다. 제일 가까운 휴게소에 정차 가능할까요?"
기사님은 백미러로 뒤를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금강 휴게소가 가장 빨라요. 거기서 세우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객들 사이로 작게 술렁임이 돌았다. 누군가는 속삭였다.
"여자 친구가 많이 안 좋나…"
굳이 아니라고 말할 타이밍도 없었다.

버스가 휴게소에 멈추자 그녀는 계속 창에 기대 숨을 고르며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받쳐 일으켰다. 휴게소 바람이 닿자 그녀는 조금 흔들렸다.

"잠깐만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천천히."

버스는 우리가 내린 뒤 금세 떠났다. 정해진 노선을 정해진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버스. 스케줄에 맞춰 이동해야 하는 승객들이 타고 있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뒤돌아보니 미등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놓친 거네요."
그녀가 어둔 얼굴로 버스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놓쳤네요."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이제부터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서서히 밀려왔다.

잠시 그녀 곁에 서서 가쁜 숨을 쉬는 그녀를 바라보는데, 지나가던 몇몇 승객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분, 남자친구인가 봐요?"
"맞아요, 어쩐지 부축하는 걸 보니…"

둘 다 얼굴이 붉어지며 서로의 시선을 비켰다. 당황했지만, 동시에 묘하게 뿌듯함이 스쳤다. 잠시라도 애인이 된 기분이랄까.
‘혼자가 아니잖아’ 하는 작은 위안이었다.

그녀는 손끝을 모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조금만… 앉아 있을게요."
나는 아무 말 없이 곁에 서 있었다. 말로 다 할 필요가 없는 순간이었다.

종합안내실로 뛰어가 119로 구급차를 요청했다.
앰뷸런스가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벤치에 앉아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가끔 눈을 감았다 뜨며 손끝의 떨림이 계속되지만, 점차 안정되는 모습이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고, 구급차가 천천히 정차했다.
"보호자분이세요?"
구급대원이 묻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런 뒤 힘겹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앰뷸런스 안에서 그녀는 거의 말이 없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가끔 눈을 감았다 뜨며 숨을 내쉬는 모습이 오래 남았다.
응급처치를 받는 동안 그녀는 점차 안정됐지만, 손끝의 떨림과 창백한 얼굴은 긴 여정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응급실에서는 수액과 혈압 체크, 산소포화도 확인 후 상태가 안정됐다.
의사는 과로와 탈수, 저혈당 상태가 겹쳤다고 했다. 큰 병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두었다면 위험했을 거라고 했다.




몇 시간이 지나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
병원 밖, 그녀는 택시를 잡고 떠날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자 희미한 불빛 속 얼굴이 비쳤다.
같이 타자는 말을 내심 기대했지만 이내 접었다. 애써 서운함을 감추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런 밤… 오래 기억날 것 같아요."
말은 짧았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택시는 서서히 멀어졌고, 그녀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졌다.

나는 병원 앞 도로에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다, 근처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걸음을 시작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 조간신문이 펄럭이고 낙엽이 흩날렸다.





* <오후에 다가온 낯선 사람들> 시리즈가 잠시 옆길로 샜습니다. '오후에 떠오른 낯선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두 편에 걸쳐 몇십 년 전의 추억을 소환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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