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도서관 세프들
남의 인생은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매우 행복하며 멋지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국 우울한 종말이 찾아온다. 구내식당의 점심 반찬이 잘 나온 것과 같은 사소한 일에라도 행복을 느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겸손한 마음으로 소소한 즐거움과 같은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가야 우울증을 간신히 견디기라도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남들도 다 힘들다’를 생각하고 인생이 ‘그렇고 그렇다(It is what it is)’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울함도 감소한다.
우울한 감정이 위험만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지구 생물 중 사람만이 우울할 수 있다. 사색할 수 없다면 우울할 수도 없다. 우울한 시간은 사색과 미래 준비 시간일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은 스스로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면서 신파극을 써 나가는 것이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웬만한 일에는 ‘It is what it is’로 퉁치고 넘어가며,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하면서, 어딘가에서 자기를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아주 아주 바쁘게 열심히 일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여야 한다. 그래야 우울증에 대한 불필요한 신파를 막을 수 있다.
어쩌면 삶 자체가 우울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함께 가야 한다.
의사 이국종의 말이다. 어떤 분이 블로그에서 인용한 글을 재인용했다. 송파도서관 지하 구내식당에서 치즈돈가스를 먹으면서 이 말을 떠올리고 완전 공감했다.
혀끝에 착착 감기는 맛있는 음식을 가성비 좋은 비용으로 먹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웨스틴 조선 호텔의 30만원 짜리 뷔페보다 행복감이 더 크다.
우리 아이들은 이런 기분을 나와 똑같은 정도로 느끼진 못하겠지?
아빠 입맛은 촌스러워. 맨날 먹을 줄 아는 게 순대나 부대찌개, 삼겹살 밖에 없어? 쓸데없는데 낭비하지 말고 돈 모아서 엄마랑 근사한 데 가서 한 번이라도 진짜 맛있는 거 즐겨보셔. 이런 핀잔을 준다.
맞는 말이긴 하다.
호화로운 식당에서 돈 쓰는 맛을 즐기는 거, 필요하다.
돈 값 할 것이다. 비프스테이크와 랍스터를 자르면서 "아. 행복해"라고 중얼거리는 아이들과 아내의 미소를 보는 것은 인생의 홍복일 것이다.
하지만 절정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살아보니 인생 별거 아니라는 것도 아는 나이다.
누구보다 성공한 사람, 화려한 인기를 누렸던 사람 이국종 씨도 마냥 행복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이내 다가올 우울한 종말을 예견하고 쓸쓸한 경고를 날렸다.
남의 인생만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화려해 보이지 않는다. 내 인생에 다가온 지극히 짧은 절정의 행복은 두렵다. 그만큼 우울의 골짜기가 깊고 아득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아내와 함께 송파도서관에 가야겠다. 열람실엔 올라가고 싶지 않다. 눈이 침침해서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하 구내식당 벽에 붙어있던 메뉴가 눈에 밟힌다. 치킨마요덮밥, 짜계치 (짜파게티 계란 김치), 사골떡만두국, 해쉬브라운, 고로케...한번 맛본 치즈돈가스 맛이 혀끝에 감돈다.
값싸고도 맛있는 점심은 오늘을 버티는 최고의 항우울제다.
내가 송파도서관에 밥 먹으러 잘 가는 이유는 또 있다. 그곳에서 만난 한 남자 때문이다. 도서관은 원래 책을 읽으러 가는 장소인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점심 메뉴판부터 들여다본다. 배고파서가 아니다. 밥을 먹고 나면 아주 짧지만 묘하게 낯선 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남자와 마주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말하자면 오후의 작은 ‘보너스’ 같은 시간.
그날도 나는 치즈돈가스를 혼자 먹고 있었다. 식당은 이미 한산해져 두어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반쯤 쉬러 온 사람들과 반쯤 도망쳐 온 사람들의 호젓한 기운이 어딘가 흩어져 있었다. 식기세척기에서 난방기처럼 뿜어 나오는 뜨거운 김이 선반에 걸리고, 아주머니들은 설거지와 바닥 닦기를 하면서 하나둘 퇴근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젖은 수건과 페이퍼 타월을 들고 다니며 식탁을 닦는 한 남자. 그는 테이블의 구석과 모서리를 몇 번씩 문질렀다. 동작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묘하게 ‘마음이 있는’ 리듬이었다. 내 자리까지 닿았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신경 쓰시지 말고요.”
처음엔 그냥 직원인 줄 알았다. 주방을 보니 아주머니들은 에이프런을 풀고 퇴근 준비 중이었다. 그의 움직임은 그들의 퇴근을 조금이라도 앞당겨주려는 배려였다는 걸 조금 뒤에서야 알았다.
가볍게 말을 건넸다.
“청일점이시네요? 남자 직원도 있나요?”
그의 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 제가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그가 말끝에 ‘허허’를 덧붙이며 미소를 짓는 순간, 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테이블을 닦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장이라고 해서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먼저 몸을 움직이는 사람. 그가 종이컵에 받아온 커피를 한 잔 받았다. 머신에서 추출한 구내식당 커피가 이상하게 진하게 느껴졌다.
“식사는 괜찮으셨어요? 자주 오시는 것 같은데.”
그 말이 시작이었고, 다음은 그의 과거였다.
그는 한때 잘 나가는 셰프였다.
‘줄 서는 집’의 주인이었다.
줄이 대각선으로 건물 밖까지 꺾여 나가던 곳.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게 앞에 사과문 붙여야 할 정도였죠. 소음 민원 들어온다고.”
그는 웃었지만, 그 웃음엔 묘하게 오래된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너졌다.
리모델링, 임대료 폭등, 코로나.
그 세 단어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었다.
“하루하루가 무너지는 게 보이는데… 손은 계속 움직여야 하잖아요. 그게 참… 이상한 경험이더군요.”
그 시절을 길게 말하지 않았다. 커피잔을 한 번 돌려 잡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 동작 하나에 분노, 당혹, 체념, 허무 같은 감정들의 잔해가 묵직하게 담겨 있었다.
“우울증이 오더라구요… 인정하기 싫었는데, 결국 인정하게 되더군요.”
일이 없어졌을 때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듯 나왔다고 했다.
“책이 머리에 들어오진 않았어요. 그냥… 앉아 있는 거요. 사람들 오고 가는 거 보면서. 그게 마음이 좀 진정됐어요.”
그 말이 나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책 대신 사람 구경. 사람을 읽는 시간. 어쩌면 그게 진짜 독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도서관에 앉아 시간을 버티던 어느 날, 게시판에 공고 하나가 붙었다.
[도서관 구내식당 운영 업체 모집]
신청서를 쓰면서도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단다.
“다섯 군데 지원했다더라고요. 경력, 조리사 자격, 식재료 관리 능력, 지역민 서비스 마인드… 이런 걸 평가한다는데… 뭐, 망한 경력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도 붙더라고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 울었을지도 모른다. 연락을 받은 날 어디에 서 있었는지, 전화기를 어떻게 잡았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그가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대충 그려졌다.
“그날 이후로… 다시 살기 시작한 것 같아요.”
새벽에 시장으로 간다. 고기 손질하고, 파를 깎고, 들기름 양을 맞추고, 기본 육수를 끓인다. 주방 아주머니 다섯 명이 오기 전, 그는 먼저 전등을 켜고 환풍기를 돌리고 칼을 세 번 갈아놓는다.
“혼자 있을 때가 제일 좋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제일 차분해요.”
사람이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설 때, 새벽은 좋은 동반자다. 그는 요즘 가끔 도서관 2,3층까지 올라가 책을 한두 권 빌리기도 한다. 예전엔 머리에 들어오지 않던 글이 요즘은 조금 들어온다며 웃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아, 오셨네요.”
나는 그 말이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는 새로 나온 메뉴라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았을 법한 친절로 치킨마요덮밥을 추천해 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글 쓰세요? 말투가… 그런 느낌이 좀 있어서.”
나는 그제야 그가 사람을 얼마나 자세히 관찰하는지 알았다.
내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 있다고 느꼈는지, 그는 식판을 대신 받으며 말했다.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천천히 드세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시고.”
누가 봐도 모를 표정인데 그가 알아봤다. 그 말 한마디가 의외로 큰 위로가 됐다. 우울을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지였다.
그의 음식은 그 순간부터 ‘식사’가 아니라 ‘위로’가 되었다.
그들이 만든 치즈돈가스는 특별한 요리가 아니다.
만두국에는 조미료 몇 스푼보다 더 큰 힘이 들어 있다.
사소한 따뜻함, 익숙한 밥 냄새, 가성비 좋은 가격... 여기에 그의 ‘버틴 시간’이 조용히 첨가되어 있다.
사람이 만든 음식은 결국 그 사람을 닮는다.
그의 음식이 항우울제를 넘어서 ‘성찬’에 가까운 이유는 간단하다. 우울의 심지를 알고, 누군가의 하루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놓는 점심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오후를 다시 세우는 한 끼가 된다.
※ 이 글은 작가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입니다.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