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사로 힘든 적이 있었다. 사춘기 아이 둘을 내 손으로 키워야 했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불쑥불쑥 자기 연민의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괴로움은 내가 다 감당할 테니 내가 힘든 만큼 아이들만큼은 바르고 건강하게 키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동안 살던 연고지를 떠나 내 고향인 부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하니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곳에 살기 싫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터라 생계가 가 장 걱정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살아오면서 학습된 무기력감과 우울증으로 인해 몸이 쉬 움직여지지를 안아 발을 딛고 문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내 마음에는 ‘어서 나가서 일을 해야지.’라는 생각과 아직 몸도 맘도 치유가 되지 않 았는데 ‘과연 내가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충돌이 일어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여섯일곱 달이 빠르게 흘러갔다.
보다 못한 지인 한 분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엄마가 빨리 일어서야 한다며 따끔한 충고를 해주려고 찾아왔다. 그분은 아직도 망설이는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주민센터를 같이 방문해 줬다. 지금 당장은 먹고살기 힘이 드니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을 알아보고 그것을 발판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모색을 해 보라는 취지였다. 주민센터는 주민 등록증 등 각종 서류를 떼어주는 일을 하는 곳인 줄 만 알았는데 나는 처음으로 복지과라는 곳에서 상담을 받아보았다. 왠지 모를 낯섦과 자격지심이 들어 한참을 머뭇거렸지만 직원은 친절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응대하며 내 처지와 상태를 세심히 확인했다. 그렇게 며칠 후 차상위계층에 선정이 되었다는 연락이 왔고 저 소득층에게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만든 문화 누리 카드를 식구수대로 발급받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사용처가 도서. 여행. 공연. 학습 등이었고 그중에 나는 특히 도서 분야가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잔뜩 움츠러들어있던 터라 밖으로 나가 문화생활을 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기에 독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간접 경험도 해 볼 요량으로 서점으로 당장 달려갔다. 평소 에세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맘에 드는 수필 책을 몇 권 골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부분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많은 고난과 부침을 교훈으로 삼아 다시 한번 희망을 안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는 진솔한 내용이었다, 그 안에서 가치관과 생각의 변화로 새롭게 도전을 해가는 이야기들은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내친김에, 당장 생계가 급했던 나는 이웃과 지인들에게 부탁도 하고 직접 아파트 게시 판마다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붙이고 과외를 원하는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운영을 했던 터라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장고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몇 안 되는 학생들로 시작했으나 그조차도 내 겐 너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스스로 의지가 생겨서 박차고 일어나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변화이다. 내 아이들이 너무 소중한 것처럼 그들도 각자 집에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인 줄 알기에 더욱 최선을 다해 가르치니 아이들도 점점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동안 말도 잘 듣고 줄곧 공부도 잘해왔던 큰아이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형편이 다른 자신을 비교하며 공부를 한다고 한들 본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수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대화를 여러 번 시도하고 또 시도했지만 아이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 채 귀도 입도 꽉 닫아버렸다.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갈 리가 만무하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이 아무 의욕도 없이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괴롭다 못해 참담했다. 공부의 때를 놓치게 될까 봐 몹시도 조바심이 났지만 한편으론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질 못하고 내 마음 힘든 것만 생각했던 이기적인 엄마였던 것 같아 뉘우침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큰아이를 불러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달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공부도 무엇도 아닌 그동안의 힘든 마음을 치유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 장 필요하다고 말하며 ‘우리 세 식구 오붓하게 잠깐이라도 여행을 다녀오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 아들은 예상 밖으로 본인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너무나 고마웠다.
여행 갈 형편이 안되었지만 주민센터에서 발급받은 문화 누리 카드가 생각났다. 감사하게도 여행 숙소 결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 같이 숙소를 알아보고 계획도 살뜰히 세워 우리는 강원도 강릉 정동진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스산한 겨울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여행객들이 꽤 있었다. 가족 단위로 온 여행 객들이 특히나 많이 있었는데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 이 보기 좋았다. 바다는 역시 동해바다인 것 같다. 짙푸른 바닷물과 철썩철썩 때리는 파 도의 포말들이 우리 가족의 깊었던 시름을 깨끗이 씻겨 내려 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 아들은 가끔씩 마음이 답답할 때 보라며 파도 영상을 찍어줬다. 아들의 진심이 느껴져서 파란 하늘에 걸린 조각구름마저 소중해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다 보니 어느 때 보다도 소통이 잘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작은 변화는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가정 형편상 여행을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던 때 인터라 문화누리카드가 아니었으면 생 각도 못해볼 호사? 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문화 누리 카드를 이용해 종종 여행을 다녔다. 여행은 그야말로 소통과 치유의 장이 되어 우리 가족에게 더욱 끈끈하고 결속을 다지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책이라고는 들여다보지도 않던 아들은 고2가 되면서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고3에 이미 사회복지 쪽으로 방향을 정해 대학을 진학했다. 잠시 휴학 후 군 복무까지 성실히 해낸 아이는 졸업과 더불어 1급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내어 본인의 꿈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사회복지사로 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보람찬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들은 돌보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 순수하고 맑아서 예쁘다고 말한다. 엄마로서 힘든 점이 없냐고 가끔 물어보지만 그때마다 힘든 점보다는 즐거운 점이 더 크다고 말해 주어서 기특할 뿐이다.
우리 가족이 이렇듯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정사로 몸도 마음도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 찾아와 곁에서 도움이 되어주고 위로를 선사했던 문화 누리 카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삶에 위축되어 있고 많이 지쳐 있을 때 문화 누리 카드는 내게 앞으로 살아갈 동기를 부여해 준 ‘마중물’이자 알을 쪼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 준 ‘줄탁동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우리 가정처럼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인 사회 소외계층에게 발급해 주는 카드를 만들고 실용화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와 배려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다. 지금도 문화의 사각지대에 놓여 일 년에 그 흔한 영화 한 편 보기가 쉽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다.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많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물리적 여유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공연, 전시, 여행 등의 다양한 문화를 누리고 향유할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에서 저 소득층과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일정 부분 문화를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 누리 카드를 발급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확장을 선사하는 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뜻하지 않게 나에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찾아와 용기와 희망을 선사해 준 문화 누리 카드에게 다시 한번 고맙 다고 진심을 전해본다. ‘ 문화 누리 카드, 너라서 정말 정말 고마워. ’
가정사로 힘든 적이 있었다. 사춘기 아이 둘을 내 손으로 키워야 했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불쑥불쑥 자기 연민의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괴로움은 내가 다 감당할 테니 내가 힘든 만큼 아이들만큼은 바르고 건강하게 키워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동안 살던 연고지를 떠나 내 고향인 부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하니 모든 것이 막막했다. 그곳에 살기 싫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터라 생계가 가 장 걱정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살아오면서 학습된 무기력감과 우울증으로 인해 몸이 쉬 움직여지지를 안아 발을 딛고 문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내 마음에는 ‘어서 나가서 일을 해야지.’라는 생각과 아직 몸도 맘도 치유가 되지 않 았는데 ‘과연 내가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충돌이 일어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여섯일곱 달이 빠르게 흘러갔다.
보다 못한 지인 한 분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엄마가 빨리 일어서야 한다며 따끔한 충고를 해주려고 찾아왔다. 그분은 아직도 망설이는 내 손을 잡아 이끌고 주민센터를 같이 방문해 줬다. 지금 당장은 먹고살기 힘이 드니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을 알아보고 그것을 발판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모색을 해 보라는 취지였다. 주민센터는 주민 등록증 등 각종 서류를 떼어주는 일을 하는 곳인 줄 만 알았는데 나는 처음으로 복지과에서 상담을 받아보게 되었다. 왠지 모를 낯섦과 자격지심이 들어 한참을 머뭇거렸지만 직원은 친절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응대하며 내 처지와 상태를 세심히 확인했다. 그렇게 며칠 후 차상위계층에 선정이 되었다는 연락이 왔는데 저 소득층에게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만든 문화 누리 카드를 식구수대로 발급받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사용처가 도서. 여행. 공연. 학습 등이었고 그중에 나는 특히 도서 분야가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잔뜩 움츠러들어있던 터라 밖으로 나가 문화생활을 한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기에 독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간접 경험도 해 볼 요량으로 서점으로 당장 달려갔다. 평소 에세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맘에 드는 수필 책을 잔뜩 골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대부분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많은 고난과 부침을 교훈으로 삼아 다시 한번 희망을 안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는 진솔한 내용이었다, 그 안에서 가치관과 생각의 변화로 새롭게 도전을 해가는 이야기들은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내친김에, 당장 생계가 급했던 나는 이웃과 지인들에게 부탁도 하고 직접 아파트 게시 판마다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붙이고 과외를 원하는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운영을 했던 터라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장고 끝에 결정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몇 안 되는 학생들로 시작했으나 그조차도 내 겐 너무 신기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스스로 의지가 생겨서 박차고 일어나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변화이다. 내 아이들이 너무 소중한 것처럼 그들도 각자 집에서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인 줄 알기에 더욱 최선을 다해 가르치니 아이들도 점점 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동안 말도 잘 듣고 줄곧 공부도 잘해왔던 큰아이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형편이 다른 자신을 비교하며 공부를 한다고 한들 본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수업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대화를 여러 번 시도하고 또 시도했지만 아이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 채 귀도 입도 꽉 닫아버렸다.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갈 리가 만무하지만 내 사랑하는 아들이 아무 의욕도 없이 하루종일 게임만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괴롭다 못해 참담했다. 공부의 때를 놓치게 될까 봐 몹시도 조바심이 났지만 한편으론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주질 못하고 내 마음 힘든 것만 생각했던 이기적인 엄마였던 것 같아 뉘우침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큰아이를 불러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달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공부도 무엇도 아닌 그동안의 힘든 마음을 치유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아껴주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 장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세 식구 오붓하게 잠깐이라도 여행을 다녀오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 아들은 예상 밖으로 본인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너무나 고마웠다.
여행 갈 형편이 안되었지만 주민센터에서 발급받은 문화 누리 카드가 생각났다. 감사하게도 여행 숙소 결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다 같이 숙소를 알아보고 계획도 살뜰히 세워 우리는 강원도 강릉 정동진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스산한 겨울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여행객들이 꽤 있었다. 가족 단위로 온 여행 객들이 특히나 많이 있었는데 서로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장난을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 이 보기 좋았다. 바다는 역시 동해바다인 것 같다. 짙푸른 바닷물과 철썩철썩 때리는 파 도의 포말들이 우리 가족의 깊었던 시름을 깨끗이 씻겨 내려 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 아들은 가끔씩 마음이 답답할 때 보라며 파도 영상을 찍어줬다. 아들의 진심이 느껴져서 파란 하늘에 걸린 조각구름마저 소중해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내려놓다 보니 어느 때 보다도 소통이 잘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작은 변화는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가정 형편상 여행을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던 때 인터라 문화누리카드가 아니었으면 생 각도 못해볼 호사? 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문화 누리 카드를 이용해 종종 여행을 다녔다. 여행은 그야말로 소통과 치유의 장이 되어 우리 가족에게 더욱 끈끈하고 결속을 다지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책이라고는 들여다보지도 않던 아들은 고2가 되면서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고3에 이미 사회복지 쪽으로 방향을 정해 대학을 진학했다. 잠시 휴학 후 군 복무까지 성실히 해낸 아이는 졸업과 더불어 1급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내어 본인의 꿈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사회복지사로 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보람찬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들은 돌보고 있는 친구들이 너무 순수하고 맑아서 예쁘다고 말한다. 엄마로서 힘든 점 이 없냐고 가끔 물어보지만 그때마다 힘든 점보다는 즐거운 점이 더 크다고 말해 주어서 기특할 뿐이다.
우리 가족이 이렇듯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정사로 몸도 마음도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시기에 찾아와 곁에서 도움이 되어주고 위로를 선사했던 문화 누리 카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삶에 위축되어 있고 많이 지쳐 있을 때 문화 누리 카드는 내게 앞으로 살아갈 동기를 부여해 준 ‘마중물’이자 알을 쪼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 준 ‘줄탁동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 우리 가정처럼 상대적으로 경제적 약자인 사회 소외계층에게 발급해 주는 카드를 만들고 실용화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와 배려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다. 지금도 문화의 사각지대에 놓여 일 년에 그 흔한 영화 한 편 보기가 쉽지 않은 이들이 많이 있다. 형편이 어렵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많이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물리적 여유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공연, 전시, 여행 등의 다양한 문화를 누리고 향유할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에서 저 소득층과 사회적 소외계층에게 일정 부분 문화를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 누리 카드를 발급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삶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확장을 선사하는 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뜻하지 않게 나에게, 아니 우리 가족에게 찾아와 용기와 희망을 선사해 준 문화 누리 카드에게 다시 한번 고맙 다고 진심을 전해본다. ‘ 문화 누리 카드, 너라서 정말 정말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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