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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법

대학원생의 본분을 잊어버릴 때 '나'를 만나다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며

대학원에 들어와서의 생활은 늘 반복적이다. 실험을 하고 수업을 듣고 논문을 읽다 보면 하루가 금방이다. 아침 9시 반까지 출근해서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삶을 살다 보면 평일은 거의 개인시간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통학러의 비애는 해본 사람만이 안다. 10시에 퇴근해도 집에 오면 11시가 넘고 씻고 누워도 11시 반이지만 일단 전제부터가 틀렸다. 칼퇴가 쉽지만은 않다. 10시에 퇴근하는 날이면 친구에게 기뻐서 “나 칼퇴했어!”라고 자랑하기 일쑤다. 그럴 때마다 친구는 내 건강을 걱정한다.


집에 와서 무엇인가를 하기에는 모든 체력을 연구실에 쏟아붓고 오다 보니 집에 오는 순간 그대로 침대에 몸을 점프한다. 오죽하면 곱슬머리에 숱도 많아 항상 저녁에 머리를 감고 자는 동안 머리를 눌렀어야 했던 내가 연구실 생활을 시작하고 난 뒤에는 샤워가 뭐야 양치도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요즘은 아침에 샤워하는 루틴으로 바뀌었다. 내 평생의 습관이었는데 이게 바뀌다니...


대학원에 오기 전에 운동을 통해 큰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에 운동도 해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실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몸을 쓰는 노동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 어떤 시간대에 해도 득보다는 실이 컸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내어 운동하는 선배들도 계신다. 존경스럽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니 사라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가 아픈지 슬픈지 기쁜지 알아차리기 힘들어졌고 왜 대학원에 왔는지조차 희미해진다. 지금 내가 무리하고 있는 건지 생각함과 동시에 이번 주에 해야 할 실험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 내가 쉬고 싶은 걸까 라는 생각과 동시에 성과를 내고 싶은 욕심이 내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면서 내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깜깜하게 만들었다.


가끔 내 머릿속에 풍선이 있고 그 안에 먹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풍선은 언제 터질까. 언제까지 내가 풍선을 터트리지 않은 채 뛸 수 있을까.

‘나’를 잃어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독서를 제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지

어릴 적 얘기를 잠시 해볼까 한다. 초등학교 때 나는 도서관에 사는 어린이였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만 되면 도서관으로 뛰어갔다. 신발 벗고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마루가 있었는데 거기는 나의 favorite 장소였다. 그때는 소설을 많이 좋아했다. '작은 아씨들' 책은 일곱 번 넘게 '노인과 바다'는 다섯 번 넘게 읽었던 것 같다. 주말이 되면 서울 각지에 있는 도서관을 친구와 친구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녔다. 독서 모임도 갖고 독후감도 많이 썼다. 그렇게 나는 책과 친해졌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도서관엔 종종 갔을 테지만, 지금 특별한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지 않는 걸 보니 초등학생 때만큼 자주 가진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친구들이 더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였다. 고등학생 땐 오히려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생기부를 채워야 했고 점심시간마다 조용히 자습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책을 읽기에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이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책과 멀어졌다.


그러던 중 재작년 24살이 되었을 때 나는 책과 다시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3월 말에 랩실 컨택에 성공하고 7월 정식 첫 출근 전까지 단 3개월이었지만 단언컨대 성인이 된 이후 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롭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책을 한 권씩 해치웠다. 일기도 자주 쓰고 혼자 카페도 많이 다녔다. 나라는 사람이 풍족해지는 시간이었다. 살면서 어떠한 목적성 없이 나는 뭘 좋아하고 내가 뭘 할 때 행복하고를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시도가 그리 많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작년의 그 3개월이 매우 소중했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 기억으로 대학원 생활을 버티는 것 같다. 


'나'를 마주하기 위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세상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사람들은 그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면의 변화에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이게 심해지면 목적성을 잃고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할 수 있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마주할 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습관과 생각들이 바뀌진 않았는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혹은 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성이 있는지, 옛날에는 뜨거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차갑게 식은 내 가슴이 어떻게 해야 다시 열정을 갖고 뜨거워질 수 있는지. 작년의 내가 가졌던 3개월처럼 탐색하고 탐구하고 깊이 빠져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생각으로만 스쳐가는 것들을 실체화하여 붙잡아보고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로 인해 '나'를 더 마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주로 대학원 생활을 하며 가지게 되는 생각들. 여러 사건들을 통해 내가 갖게 되는 궁금증들. 그리고 어찌 보면 내가 성장하는 기록들을 이곳에 남겨볼 예정이다.


나는 매우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는 사람이다. 걱정도 많고 궁금증도 많고 무엇보다 나는 '인생'에 매우 관심이 많다.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도. 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왜 그렇지 않은가?'라는 물음을 가지면서 살고 있다. 지구 평화까지도 걱정하며 살기 때문에 내 머리가 터지지 않아 다행이랄까.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이 실타래는 더 엉키고 설켜서 풀기를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충분한 여유와 시간을 부여한다. 실타래의 실 하나 섬유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글로 옮기며 눈으로 확인한다. 그러면 툭 이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별거 아니네?


삶이 괴로운 사람에게 일기를 써보는 게 어떠냐 권해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하지만 일기는 독자가 본인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지구 평화를 꿈꾸는 엄청난 이상주의자로써 나의 고민과 인생의 철학들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묻어두고 싶지 않았다. 내 글이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청년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러면 지구 평화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거 아닐까? (물론 수억 발자국 중에 한 발자국일 테지만 말이다.)


청년의 때는 꿈을 꾸고 이룰 수 있는 추진력이 있는 인생의 몇 안 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글을 쓰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내 도전 또한 풀타임 근무하는 공대 대학원생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나' 다웠다. 나는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물어가며 실타래를 풀어나갈 것이다. 


그게 멈추는 날이 나의 마지막 날이기를. 그전까지는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기를. 그리고 끊임없이 그 흔적을 남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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