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
올해 2월 초에 샀던 일기장을 다 썼다.
일기장을 끝내기까지 몇 장 안 남겼을 때, 책장에 꽂혀 있던 그전 일기장을 들춰봤다. 시작 날짜를 보니 2022년 9월 25일. 약 2년 전부터 시작된 기록이었다.
일기장은 내 할 일 목록부터 간헐적으로 하는 큐티(QT) 중 인상 깊었던 성경 구절을 적은 것까지, 그날 하루의 모든 일들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때로는 날 것의 감정을 적기도 하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짧게 기록하고 내 생각을 적기도 한다. 감사일기를 적을 때도 많지만, 보통은 마음이 어지러울 때의 생각들이 더 길게 나열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미 기억 창고 어딘가에 묻혀 글을 읽어도 기억나지 않는 그때 그 시간들. 문득 궁금해졌다.
2년 동안 나는 변화된 게 뭐가 있을까?
그전 일기장을 찬찬히 둘러보니, 어제 거의 쉼 없이 몇 분을 머릿속에 있는 내용들을 끄집어 적어 내린 내용들과 2년 전의 내용들이 거의 일치함을 알게 됐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무기력함.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오는 서운함 속에서 보이는 나의 밑바닥.
조금 더 성장한 내 모습을 기대했는데. 왜 아직도 2년 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일까.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힘이 없어진 마음이, 2년 전 일기를 훑어보면서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왜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을까.”
엄마한테 카톡으로 전화를 걸어, 푸념 섞이듯 내뱉었다.
힘든 마음을 실시간으로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중 탑 3 안에 드는 우리 엄마. 엄마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아 부딪힐 때도 많았지만, 그래서인지 이제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한다. 속상한 나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엄마는, 뜻밖의 위로를 건네줬다.
“00아, 지금까지 너무 많이 좋아지고 나아졌어.
그리고 원래 제일 변화되기 직전이 가장 힘들고 어렵다고 하잖아. 지금 그런 때인 거야.”라고.
일기를 쓰며 좋은 점은,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들을 시간이 지나고 객관적인 눈으로 비교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내 주변인들에 대한 마음과 관계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내가 아끼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때로는 그 감정에 쉽게 전염되는 나의 모습들. 가족들과의 관계 등등.
2년 전 일기를 찬찬히 훑어보면, 그때도 나는 참 많이 바뀌고 싶어 했다. 변하고 싶어 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당시에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부담과 어려움이 많았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혼자 낑낑댔던 책임감.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더 쉽게 느꼈던 서운함들.
그래서였을까.
2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한국은, 가고 싶으면서도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한국에 가면 한 번쯤은 거치는 가족들과의 말다툼을 피하고 싶었다. 대체로는 좋은 시간들일 텐데 왜인지 나는 안 좋았던 그 특정 순간을 기억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랬던 관계가 지금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흡사 도덕책에 나오는 ‘이상적인 가족들’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아빠와 엄마는 사이가 돈독해졌고(아마도?) 동생과 아빠와도 더욱 자주 통화하고, 엄마 또한 웃는 시간이 많아졌다. 명절 때가 다가오면 괜히 철렁이던 마음들도 이제는 한시름 놓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족들한테도 힘든 마음을 털어놓는 게 어려울 때가 있다. 머나먼 타지에서 카톡 하나로 소통 하는 첫째 딸이, 괜히 그들의 ‘아픈 손가락’이 될까 봐 싫었다. 몇 년 전, 부모님 속을 엄청 썩였던 10대 시절을 지나 20살 첫 유학길을 올랐을 때 “사실 그때 너 떠나보낼 때, 속이 후련했어”라고 장난스럽게 말한 아빠의 말이, 농담임에도 때때로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가족들과 멀리 떨어진 타지에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혼자서 어떻게 해서든 지내려 하니 그나마 ‘온실 속 화초’를 피했지, 라며. 지금은 곁에 J도 함께하지만.
무언가를 성취하고, 쌓아나가는 변화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보다 내 주변 사람들한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조금 더 포용력 있고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나에 대해선 가볍게, 남에 대해선 진중하게 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무기력함에 물들지 않고, 대신 나의 밝음으로 이끌어주면 좋겠다.
상대방이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차리고 이해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단점들을 마주하였을 때, 쿨하게 인정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있는 모든 일들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먼저 제일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그리고 J한테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J를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조심히 아껴나가며 대하고 싶다.
몇 년 뒤 이 글을 볼 때는, 기꺼운 마음으로 흐뭇하게 웃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