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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풀 Jan 30. 2024

뭐든지 대화가 필요해, 그게 가족일지라도

아빠 생신날의 소소한 기록

며칠 전, 아빠의 생신이셨다.


나는 아빠의 생신을 한국 시간으로 생일 당일 오전 9시에 느지막이 알게 되었다.



그날이 주일이었기에 가족들에게 가족톡으로 “교회 가는 길이에요?”라고 물어봤는데 “지금 가는 중~”이라는 대답과 함께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는 동생의 카톡이 날아왔다.


카톡을 써 내려가던 손을 순간 멈칫했다.


오늘이 아빠 생일이라고?



엄마와 아빠의 생신은 매년 음력으로 챙기기 때문에 날짜가 항상 바뀐다. 어디 메모장에 기록해 두고 내가 음력을 미리 알아놔서 챙기면 되는데도, 나는 굳이 게으르게 엄마께 매해 초마다 생일이 언제인지 물어보곤 했다.


불과 이주 전에도 엄마께 부모님의 생일 날짜를 알아놔서 메모장에 적어뒀는데, 요새 또 날짜 개념 없이 지내다 보니 이렇게 하루의 절반이 다 지나가는 시점에서 알아버렸다.




동생은 아빠 생신이라는 카톡에 이전에, 전날 밤에 아빠 생신을 미니 조각 케이크와 함께 축하한 동영상을 올려줬다.

어렸을 때부터 이어져온 우리 가족의 연례행사였다. 생일만큼은 미니 조각 케이크든 티라미수이든 무조건 그날 자정에 디저트와 함께 모여서 축하하기.



그러나 부모님과 동생의 생일이 다 연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유학을 온 다음부터는 가족들의 생일을 직접 축하할 수 없었다. 그나마 카톡 덕분에 내가 사는 지역에 따라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시차에 맞게 일어나서 가족들의 생일을 축하했는데. 이번에는 시차도 별로 차이 많이 안 나는데 미리 말해주지.


괜히 아빠의 생신을 제 때 축하 못 드린 게 미안해서 서운함이 올라왔다.


얼른 아빠께 영통을 걸어 아빠의 생신을 직접 축하드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직접 생신을 축하 못 드리는 대신, 생일 용돈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이튿날 저녁, 오랜만에 엄마랑 통화를 했다.


전화 통화 첫마디에 (내가 제 때 못 챙긴 건데 괜히 찔려서)엄마한테 ‘그날 카톡으로 전화 주지 그랬어.’ 라며 운을 떼었다.


그런 나의 말에 엄마가 대답하시기를, “엄마는 원래 그러려고 했어. 근데 아빠랑 00(동생)이 괜히 너 그때 피곤할까 봐 전화하지 말라고 말리더라고.” 이어서 전해주시는 말이, “최근에 네가 엄마한테도 생일 용돈 줬잖아. 그래서 아빠가 괜히 너 타지에서 힘들게 일하는데 아빠한테도 용돈 드려야 된다는 부담 있을까 봐 더 하지 말라 그러더라고.”



안 그래도 아빠는 며칠 전 내가 아빠께 생일날 뭐 가지고 싶으시냐는 말에 아빠는 아무것도 필요 없고 엄마한테만 잘해주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엄마한테도 잘해야 하지만, 그래도 엄마한테만 드리고 아빠한테는 안 드리면 당연히 서운하실 거라고 어림짐작했다. 그러나 엄마의 말을 들으니, 아빠는 그 말씀을 진심으로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미안하고 감사했다.





엄마와의 전화통화 전까지는 ‘이제 내가 외국에 있는 시간도 오래되니까 점점 이런 것도 더 함께 못하게 되는구나.’라는 씁쓸함이 마음 한가운데에 스쳐 지나갔었다. 그러나 엄마를 통해 그 자세한 뒷배경을 알게 되면서, 여전히 가족들이 나를 많이 생각해 준다는 것도, 오히려 내 생각보다 더 많이 나를 배려하는 마음에 이런 소소한 오해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역시 뭐든지 대화가 필요한 법이었다. 


특히 요즘에 더욱 지속적인 대화의 필요성을 많이 느낀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만약 내가 물어보지 않고 엄마가 대답해주지 않았으면 아마 나는 내 시선으로 이때의 일을 곡해해서 바라봤겠지. 내심 섭섭해하면서.


여전히 아빠의 깊은 배려를 못 알아채는 나는, 참 어리다.




TMI:

아빠께 보내드려야 될 생신 용돈을 잘못하고 동생 계좌로 보내버렸다. 다행히 동생 덕분에 배달 사고는 나지 않고 안전히 아빠께로 보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과 더욱 애틋해지는 것 같다. 그건 비단 나뿐만 아니라 동생도, 아빠도, 엄마도 그러한 것 같다. 예전에는 속을 많이 썩이던 첫째 딸이 유학길에 오를 때 내심 속이 후련했다고 하는 냉철하신 아버지였는데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생기는 그리움일까.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러다가도 오랜만에 집에 돌아가면 또 달라진 생활방식으로 귀여운 조정의 방식을 거치지만, 그럼에도 이 넓은 세계 어딘가에 나를 생각해 주는 또 다른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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