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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풀 Jul 01. 2024

그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임을

애정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이 통화가 끝나고 남은 저녁 일정이 어떻게 되냐는 내 물음에 친구는 "이따가 할머니랑 엄마랑 같이 통화할 예정이야."라고 답했다. 엄마와 통화하는 건 그렇다 쳐도 할머니까지 셋이서 함께 그룹콜을 한다는 말은 신기해서 원래 그렇게 주기적으로 통화하냐고 물었다.


친구는, "보통은 그런 편이지." 라며 "우리 가족 중에 할머니가 보스야"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나도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와 동생을 많이 돌봐주신 할머니.

동생을 포대기에 감싸 엎고, 나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시장 골목길에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막 사신 따끈따끈한 닭강정을 건네주시던 할머니.

주말에는 사우나에서 피부가 맨질맨질해질 때까지 때를 밀어주시던 할머니.
언제나 호탕하고 쾌활하셔서 "전화받을 때는 목소리 기어 죽게 말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 00아"라고  말해주셨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는 나에게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성인이 되면서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으로만 바라봤던 시간과 마음이 변질될 뻔한 순간들이 있었다.



호탕하게만 여겨진 할머니의 직설적인 언변은 어느 순간부터 폭언으로 바뀌었다. 그 대상은 엄마였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일을 자세히 알긴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왜 자주 전화를 안 거느냐’, ‘너는 불효녀다’라는 말씀부터 비수에 꽂히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셨다.



재작년 한국에 있을 때 엄마와 이야기하던 도중, 엄마의 핸드폰으로 할머니께 전화가 왔다. 스피커 폰으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쩌렁쩌렁 들리는 그 외침에 내가 전에 알던 할머니가 맞나 싶었다. 이후, 때로는 나한테까지 전화를 하셔서 은근하게 엄마에 대한 섭섭함을 표현하셨다.

 
 

이런 상황이 되면 보통은 중립의 입장을 취해야 했다. 자세한 내막도 알지 못하는 데다가 할머니와 엄마 두 분의 심정이 어떤지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머니가 야속하기만 했다. 한편으로 언제나 나에게 존경의 대상으로만 남을 줄 알았던 분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에 대한 속상함도 있었다.


그래서 1년 전, 한국에 잠깐 머물렀던 기간 동안 할머니를 딱 두 번 뵈었다. 더 시간을 내서 찾아뵐 수 있었을 텐데, 통화할 때나 함께 있을 때면 엄마에 대한 섭섭함을 공공연하게 표현하시는 할머니와 있는 게 불편했다.



그러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밤낮 바꿔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다른 지인들과도 제대로 작별인사 못하고 허둥지둥 가던 그날, 할머니는 나에게 또 엄마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너한테 밥 사줬어야 됐는데 엄마 때문에 못 그랬다’ 등의 이야기들.



답답한 마음에 “할머니, 엄마는 그렇지 않아요. 그때 저도 엄마한테 얘기하는 거 들렸는데 그렇게 말하시면 속상해요..”라고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엄마한테 소리 지르면서 말했던 내용들을 그대로 나한테 말했다. “너 시차 핑계 대면서 못 볼 것 같다 그러고, 내가 너 00일 날 간다는데 그전에 연락 하나 안 하나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들.



그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나한테까지 그렇게 가시 돋친 말씀들을 할 줄 몰랐다.


어렸을 때 내 손에 맛있는 것을 쥐어주시고, 친구들한테 자랑스럽게 ‘친할머니 할아버지랑은 정이 없어도 외할머니는 다르다’고 말했던 그 할머니가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정서적 교류가 없는 친할아버지가 그때는 더 고맙게 느껴졌다.
 
내가 병원 다니고 일하느라 직접 못 뵙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에, “못 찾아뵌 건 문제가 안 된다”며 “건강만 하라”라고 대답하시던 친할아버지. 남아선호 사상이 가득한 친가에서 비록 나에게 애정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와의 전화통화 이후, 할머니의 대답이 더 극명하게 대조됐다.



그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펑펑 울었다.

밤낮 바꿔 일하면서 얻은 다래끼로 부은 눈이, 나중에 거울을 봤을 땐 가로줄 하나로 되어 있었다.



이후, 다행히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이모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줘서 가능했다. 그 소식을 듣고 나 또한  그 전의 마지막 통화로부터 5개월 뒤, 다시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통화를 하면서 우셨다.



나도 울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아니, 말을 정정하겠다.

상처… 라기보다는 경계심이 들었다.
 


‘할머니가 또 어느 날 그때와 같이 비슷한 말을 하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와 같은 조심스러운 생각들. 이제 온전히 할머니를 애정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특히 이전에 그런 말들을 내뱉으시고 나한테 “엄마한테 잘해. 너희 낳느라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어.”라는 말씀들은, 엄마를 위한 말들보다는 할머니 본인을 위한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나도 한 때는 우리 할머니가 그런 존재였는데, 지금은 그렇게 보기 힘들어졌네.”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어려지는 걸까”라는 의문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친구가 갑자기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을 소개해줬다.


주인공은 자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연구진들의 기술 덕분에 점점 그 자폐를 치료했고 급기야는 어떤 인간보다 똑똑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폐 시절, 자신을 진심으로 위해주던 연인과 헤어지고 삶이 더 힘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자폐 시절에는 자신을 차별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괴롭힘이 오히려 주인공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표현이라고 착각한 반면, 점점 똑똑해지면서 자신이 알던 세계가 그렇지 않음을, 그리고 흔히 똑똑한 사람이 가지는 우월주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이해 못 하는 마음들이 주변 사람들이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똑해진 주인공은 다시금 스스로 연구를 해, 자신을 조금 덜 똑똑한 자폐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그는 “오히려 덜 똑똑해지는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하나 싶었더니, 친구가 이 책의 내용이 자폐에 대한 걸 다루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일대기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말해줬다.
 


어렸을 때는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가장 두뇌회전이 빠르고 똑똑해질 때, 우리는 때로 더 오만해진다.

퇴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노년 시절이 되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어렸을 때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친구는 이어 말했다.


“어쩌면 나이 듦은 우리가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 행복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싶어. 우리 할머니는 귀가 점점 안 좋으신데도 보청기를 안 끼려 하셔. 그래서 나도 할머니에게 거의 소리지르시피 얘기해야 하는데, 그래도 할머니가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까 싶고… 그래서 그냥 더 잘해드리려 하며 통화하지.”



그런 친구의 말에 이전 나의 생각과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친구처럼 할머니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해 보려 했나?

그저 ‘왜 저러실까’ 라며 선을 긋고 마음 문을 닫아버리지 않았나.






이번에 할머니를 한국에서 다시 뵙게 되었을 때, 할머니가 그전보다 말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하시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에게 “00아, 할머니가 너 일하느라 바쁜데 방해할 까봐 전화를 못 거니까, 네가 나한테 편할 때 전화를 줘야 돼, 알겠지?”라고 말하셨다.



그때 그 시간과 말씀이 떠올라 친구와의 전화 통화 후 다음 날,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가 기뻐하며 받으셨다. 그러면서 “내가 너 한국 왔을 때 잘 못 챙겨준 게 생각나서 미안한데 이렇게 전화 줘서 고맙네”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 말씀에 ‘제가 더 자주 전화드릴게요”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내 어린 시절 선물 같은 시간을 준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그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이 시간이

할머니가 나한테 해 주신 것처럼 선물 같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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