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 직선의 도시, 곡선의 퇴근길

<Chapter 3. 일상의 소란으로부터의 망명>

by 비효율의 기록

굳이 멀리 돌아가는 퇴근길.


나도 모르게 길게 내뱉어지는 한숨. 찌푸려지는 미간과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오늘도 하루를 마친다. 한없이 작아지던 나의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긴다. 퇴근, 이 하나만을 바라보며 오늘도 살아낸 나의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내디딘 발걸음은 집을 향해 속도를 높이는 대신, 길을 잃기로 작정한 듯 굳이 느릿하게 에두르는 길을 택한다.


바스락 바스락 발에 채이는 낙엽을 괜스레 걷어 차 보기도, 일부러 발로 밟아 바스라뜨리기도 한다. 나부끼는 낙엽이 마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오늘의 나 같기도, 부서진 조각들은 짓밟힌 자존감 같기도 하다. 발 밑의 낙엽들에서 시선을 옮겨 저 멀리를 바라본다. 나의 하루는 끝났지만 아직도 바삐 세상을 밝히는 빛들이 이리저리 일렁거린다.


저 빛들은 유독 직선으로만 뻗어 나간다. 가장 빠른 길로,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느라 옆을 볼 겨를도 없는 저 빛의 속도가 가끔은 숨이 막혔다. 세상이 정해놓은 최단 거리의 삶 속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다 보면, 내 마음의 모서리들은 늘 날카롭게 깎여나가기 일쑤였다. 회사에서 나에게 허락된 자그마한 책상 위에서 나는,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숨통의 죄여 오는 마감기한에 허덕이며 앞만 보고 달리곤 한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기엔 모니터 속 쉴 새 없이 쌓여가는 메일함과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가 나의 시선이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굳이 구부러진 퇴근길을 택했다. 남들에겐 낭비되는 시간일지 모를 이 멀리 에두르는 길 위에서만, 나는 비로소 누군가의 무엇이나 굴러가는 회사를 위한 부품이 아닌, 짓밟힌 자존감의 조각조차 오롯이 내 것으로 껴안은 '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선을 돌려 다시 어둠이 짙게 깔린 발밑을 본다. 화려한 전광판 아래 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낙엽의 잎맥이, 가로등의 희미한 잔광 아래서야 겨우 제 형체를 드러낸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빛의 중심에 서려 애쓰지만, 나는 오늘 이 소외된 어둠이 반갑다. 휘황찬란한 빛으로부터 멀리 도망쳐 나온 자만이 누리는 이 지독한 적막함. 소란스러운 성취 대신 바스락거리는 패배를 밟으며 걷는 이 길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하루 중 내가 가장 정직해지는 유일한 공간이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현관 불빛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내일'이라는 직선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신발 밑창에 묻어온 으깨진 낙엽 가루만큼은 버리지 않고 가져가려 한다. 적어도 오늘을 마치며 내가 택한 굳이 에둘러 오는 길에서 나는, 부서진 조각마저 온전히 나의 것임을 확인했으니까.


굳이 빙 돌아오며 시간을 낭비한 동안, 현관 거울 속에서 아까보다 조금은 느슨해진 눈매를 마주한다. 지끈거리던 머릿속의 소음은 어느덧 저 멀리 일렁이던 도심의 불빛만큼이나 아득해져 있다. 나는 비로소 오늘의 진짜 마지막 발걸음을 집 안으로 내딛는다. 내일은 또다시 숨 가쁜 직선의 경주가 시작되겠지만 상관없다. 내일의 퇴근길에도 나는 나를 기다리는 또 다른 낙엽 조각을 기꺼이 찾아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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