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비효율>
굳이 쓴소리를 건네는 마음.
입안에 고이는 평온한 달콤함은 길지 않다. 달콤함을 머금은 채로 안온한 방의 문을 열고 나서면, 곧장 혀끝을 아리게 만드는 씁쓸한 맛이 우리를 기다리곤 한다. 바로 '쓴소리'다. 쓴소리, 말 그대로 달콤하지 않은, 씁쓸한 맛을 남기는 말들이다. 상황에 따라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유쾌하지 않을 수 있는 이런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잘 지내고만 싶은 마음이라면 이런 말을 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잘 닦아온 관계의 표면에 깊은 금을 내고, 그 균열 사이로 공들여 쌓은 신뢰를 흩어지게 만들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의 삶이 부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아릿한 쓴맛을 서로에게 건네곤 한다.
근본은 애정이지만 그 겉모습은 가시가 돋은 덩굴로 감싸고 있기에 우리는 종종 이를 우리를 향한 ‘공격’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다. 내가 옳지 못한 상황에, 옳지 못한 방법으로 나를 스스로 끊임없이 갉아먹고 상처 입히던 때였다.
깊은 우울에 잠식되어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곪아갈 때, 친구가 수차례 건네온 다정한 위로에도 나는 여전히 침잠하며 고집스레 문을 걸어 잠갔다. 결국 친구가 내뱉은 최후의 처방은 이랬다.
“야, 정신 차려. 언제까지 방 안에서 혼자 찌질거리고 있을 건데. 너 생각하는 사람들은 걱정도 안 되냐?”
그 말은 벌어진 상처에 생으로 들이부은 알코올 같았다. 너무 따가워서 눈물이 핑 돌 만큼. 이미 찢기고 베인 나는, 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던 친구의 말을 치료로 인식하지 못했다. 깊게 베인 상처를 소독하는 손길은 쓰라렸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뿌리쳐 버렸다.
뭣도 모르면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내가 지금 차릴 정신이 어디 있다고? 너는 지금 내가 어떤 고통 속에 헤엄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그리 쉽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몇 날 며칠을 친구의 연락을 읽지도 않은 채로 방치했다. 참으로 비효율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을 주고도 돌아오는 건 무시라니! 그럼에도 친구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손이 내쳐질지도 모른다는 걸 예상했음에도 굳이 내게 소독약을 들이붓고 조심스레 약을 발랐다.
며칠 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가는 화면 위로 친구의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포기할 법도 한데, 친구는 여전히 그 비효율적인 다정함을 멈추지 않았다.
깨끗이 소독하고 약을 바른 덕에, 상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흥, 뭐라고 하는지나 보자’하고 열어본 메시지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나를 찌르고 질타하는 줄로만 알았던 가시 돋은 말들이, 한 꺼풀 벗겨 보니 실은 상처 위를 부드럽게 훑고 지나가던 연고 발린 면봉이었다.
비로소 곪아 터진 상처의 흐르던 진물이 멈추고 딱지가 앉았다. 나조차 포기하고 방치하던 상처를 끝까지 살피고 다독여준 친구의 손길 덕분이었다.
“카페나 갈까? 내가 딸기 케이크 살게.”
내쳐진 손을 다시 잡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미 내가 너의 손길을 외면했으니 이번엔 내가 거절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 너머에서 돌아온 것은 기다렸다는 듯한 흔쾌한 수락이었다.
카페에 마주 앉아 몇 시간을 쏟아낸 수다 끝에 깨달았다. 남인 나에게 미움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쓴맛을 건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비효율이라는 것을. 보답으로 건넨 케이크의 달콤함이 입안을 채운다. 이제 더는 그 쓴맛이 두렵지 않다. 나에게 닿기까지 친구의 입안을 먼저 얼얼하게 만들었을 그 쓴소리들이, 실은 나를 살리려는 보약이었음을 안다. 나를 일으킨 너의 손이 민망하지 않게, 나는 이제 기꺼이 문을 연다. 문밖은 어느덧 시릴 정도로 환한 빛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