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 설거지로부터 도망쳐
코인 노래방으로 망명하기

<Chapter 3. 일상의 소란으로부터의 망명>

by 비효율의 기록

굳이 찾아가는 나만의 비밀 좌표.


나를 돌보고 관계의 곁가지를 쳐내며 단단해지려 애쓰지만, 삶은 여전히 불쑥 무례하게 나를 찌른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집은 가장 편안한 장소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 가장 편안한 공간이 어느 날엔 나를 옥죄여 오고 갑갑하게 만드는 곳이 되기도 한다. 일상의 의무가, 밀린 빨래와 설거지 더미가,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나의 집인데 이곳은 어느새 나의 안식처, 나의 지지자가 아닌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이 되어 나를 집어삼킨다. 안식처여야 할 공간이 ‘치워야 할 일’들의 전시장으로 변모해 생경하고 숨 막히는 곳이 될 때, 나는 비로소 이곳으로부터 잠시 떠나기로 한다.


우리 동네 버스는 좀처럼 약속을 지키는 법이 없다. 운이 좋으면 바로 올라타지만, 운이 나쁠 땐 20분 넘게 길 위에서 멍을 때려야 한다. 그런 버스를 타고 30분, 다시 5분을 걷는 수고를 들여 나는 굳이 한 카페로 향한다. 이 카페는 가장 커피가 맛있는 집도 아니고, 잡지에나 나올법한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시선을 휘어잡는 곳도 아니다. 집 앞에도 널린 게 카페지만, 이곳의 주광등 아래 놓인 원목 테이블 위에서만 비로소 나는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고 나로서만 존재해도 괜찮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이곳에서 나는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다. 어느 날엔 책을 읽고, 어느 날엔 창가 자리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멍을 때린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거리를 활보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가만히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이 순간에 나는 다시 나의 호흡을 찾아간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달콤 쌉싸름한 커피와 함께 나를 집어삼키던 감각을 이젠 내가 삼킨다. 책을 읽거나 멍을 때릴 뿐이지만, 30분의 소음과 기다림을 통과해 도착한 이 자리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가장 아늑한 검문소가 된다.


울적함이 차오를 때면 나는 코인 노래방의 작은 문을 연다. 평소엔 큰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 순간엔 노래방에서 울리는 나의 소음이 갑갑한 내 마음의 탈출구가 되어준다. 가사를 뱉어내고 음률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에 고여 있던 감정의 불순물들이 선율을 타고 흘러나간다. 때로는 청승맞게 눈물이 고이기도 하지만 무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곳에서 나는 유일한 가수이자, 가장 열렬한 관객이기 때문이다. 박자가 어긋나고 고음이 흔들려도 괜찮다. 무너진 음정을 다시 잡으려 애쓰는 그 시간 동안, 나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방 안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고른다.


결국 내가 굳이 버스를 타고, 굳이 작은 방 안으로 숨어드는 이유는 지도 위의 어느 좌표를 찾기 위함이 아니다. 그곳들은 무너진 나를 잠시 내려놓고 수선할 수 있는 나만의 '심리적 요새'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느라 가빠진 숨을 카페의 주광등 아래서 가라앉히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느라 어긋난 삶의 음정을 노래방의 반주에 맞춰 다시 조율한다.


이제야 나는 안다. 내가 굳이 길 위에서 시간을 버리고, 굳이 좁은 방 안으로 숨어들었던 그 모든 발걸음 속에 내 마음이 살고 있었음을. 나의 ‘굳이’는 나를 살리기 위한 가장 치열한 생존 본능이었다.


오늘도 나는 낡은 신발을 꺾어 신으며 문을 나선다. 효율적인 동선도, 경제적인 선택도 아니지만 상관없다. 오롯이 나의 요새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 '굳이'의 발걸음 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밀린 설거지를 마주할 수 있는 오늘의 내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IMG_2285.jpg 무너진 삶의 음정을 다시 조율하던 밤. 22곡의 소음 뒤에야 비로소 찾아온 나의 평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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