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비효율>
굳이 사과하지 않은 뒤에 찾아온 평온.
흐르는 식은땀과 자꾸만 깨물어지는 입술. 갈 곳 잃은 눈동자와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손들. 어떻게든 상대방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횡설수설하며 쏟아지듯 튀어나오는 말들. ‘나는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어’,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될 변명과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늘어놓았다. 마음 깊은 곳에선 억울하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진정으로 잘 지내고 싶어 마음을 내어주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리된 것일까.
나는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을 죽기만큼 싫어했다. 관계에 서툴렀던 나는 내가 100만큼 잘해주면 상대방도 100만큼은 아니더라도 80만큼은 날 좋아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80만큼의 호감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에 혼란스러워하며 나의 잘못을 찾느라 온종일 머리를 싸맸다. 그럼에도 이유를 찾기 어려워지면, 영문도 모른 채 변명과 사과를 늘어놓곤 했다.
그것은 다정함이 아니었다.
그저 미움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자아낸 비겁한 성실함일 뿐이었다.
사람 사이의 일은 산술적으로 계산되는 일이 아니다. ‘100만큼 잘해주면 80만큼은 돌아오겠지’라니, 복잡한 이 상호작용을 게임 경험치 마냥 여기는 이 얼마나 오만한 발상이었는가. 나부터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박애주의자가 아니면서 다른 이들이 내게 그리 다가와주길 바라던 나는 정말이지 어리고 어리석었다. ‘상대방의 마음’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유한 영토를 나는 달콤한 말과 행동으로 내 것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자경단의 저항은 사과와 변명으로 무력화시키고자 했던 셈이다.
이제야 민낯이 보인다.
참으로 잔인한 다정함이었다.
나의 호의는 사실 가장 효율적인 정복의 수단이었고, 끝내 나 자신만을 위한 위안이었다.
인정하기로 했다. 나의 계산은 오류로 가득했고, 계산기를 두드리던 행위 자체가 무의미했다는 것을. 저 사람과 나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나의 잘못일 수도, 저이의 잘못일 수도, 심지어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도 있다. 그저 나의 톱니바퀴와 저이의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았음이 유일한 문제라면 문제겠지.
어긋난 톱니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젠 굳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고자 나를 깎아 끼워 넣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다. 억지로 나를 도려내어 끼워 맞춘 관계는 결국 흉터만 남긴 채 헐거워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손때 묻은 계산기를 치우고 나를 조각하던 칼을 내려놓으니, 그제야 비릿한 피 냄새 대신 고요한 방의 공기가 느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발견한 방 안엔 외롭고 무기력한 겁쟁이가 웅크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타인의 시선을 쫓느라 주인 잃었던 방을 묵묵히 지키며 나를 기다려온 '진짜 나'가 오랜 시간 방치 돼 줄인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깎던 칼로, 이젠 좋아하는 케이크나 잘라 나에게 먹이기로 했다. 안 맞는 균열에 굳이 나를 맞춰 넣고자 스스로를 도려내던 칼을 케이크 조각이나 나누는 데 쓰고 나니 비로소 개운해졌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골머리를 썩이고 횡설수설하던 소란의 시간은 가고, 입 안 가득 달콤함이 고이는 고요하고 평온한 침묵이 찾아왔다.
이젠 굳이 사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오만한 배려를 거두고, 나를 사랑해 달라 읍소하던 비굴한 아우성을 멈추는 일이다. 타인의 영토에 억지로 깃발을 꽂지 않아도, 모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결핍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완벽하지 않은 채로 고요한 방에 앉아, 쏟아지던 처절한 변명을 거두어들인다. 소란스러운 사과가 멈춘 자리에 비로소 침묵의 평온이 고인다. 더 이상 눈치를 살피고 식은땀을 흘리며 손톱을 깨물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방에서, 환심을 사기 위해 달콤한 말을 내뱉던 입술은, 이제 나를 위한 케이크를 머금으며 달콤하게 채워진다.
침묵은 더 이상 내게 텅 빈 고독함이 아니기에, 이젠 나를 깎아 타인에게 맞추기보다 깎이지 않은 본연의 나로 이 방에 오롯이 머무는 법을 배운다. 내일은 사과 대신, 그저 맛있는 케이크 가게를 찾는 일에나 몰두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