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장난을 하던 친구들은 종종 물었다. "근데 너네 아빤 어디 있어?" 아이들의 질문은 순수하고도 직설적이다. "어렸을 때 미국에 가셨대." 아무렇지 않은 척, 익숙하게 대답하고 나면 이제 시작이다. "왜? 그럼 언제 오셔?" "그럼 엄마 아빠 따로 사는 거야?" “왜 안 오셔?” 심지어 “거기서 돌아가셨어?” 무척이나 궁금했나 보다. 이런 무차별적인 질문 폭격을 맞을 때마다 매번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도 몰라.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고!’ 거침없이 질문하는 아이들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매번 거짓말을 하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웠고 죄책감이 들었다. 어른들의 ‘아빠의 미국행 이야기’는 오히려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했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은 눈두덩에 파란색 아이섀도를 덕지덕지 칠한 할머니였다. 새 학기 첫 면담에서 그녀는 뭔가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안경을 콧잔등까지 내려쓰고 학생기록부를 보던 그녀의 첫 질문. "부친 교통사고 사망? 엄마는 주부고, 그럼 돈은 누가 벌고 있니?” 90년대여서 그랬을까? 학생의 인권 따위보다는 본인의 궁금증이 먼저였던 그녀는 새로운 친구들이 모여있는 교실 안에서 큰 목소리로 물었다. 하, 내 잘못도 그 누구 잘못도 아닌 일로 언제까지 조바심 내며 살아야 하나. 이 센스 없고 배려 없는 눈 앞의 어른이 미웠다. 나에게 이 모든 걸 비밀로 부쳐온 우리 가족마저 미웠다.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아빠의 부재를 못 느낄 만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게 해 준 것도, 집 열쇠 목걸이를 하거나 화분 밑에서 열쇠를 찾아 빈 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게 했던 것도, 갑자기 그 모든 게 다 슬퍼졌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서로를 위해 마음속으로 그를 기리기로 무언의 약속을 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마녀 같은 어른에게 차별을 당하거나, 색안경을 낀 수준 낮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까 봐 만들어진 ‘미국 이야기’도 점차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거짓말보다 차라리 침묵이 나으니까.
‘아빠 없는 애’와 ‘아빠가 없어도 훌륭하게 잘 큰 아이’ 중 후자가 되기 위해 매 순간 애를 썼다. “독하다.” “대단하다, 정말.” “엄마가 정말 잘 키워내셨다.” 이렇게 인정받는 것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하며 즐거웠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평생 지낼 것을 생각하니 주어진 내 삶이 너무도 초라하고 비굴하게 느껴졌다. 이젠 타자 중심이 아닌 진정한 본연의 내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나를 드러내고 싶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취향, 혈액형은 물어봐도 나이, 대학, 사는 동네, 회사 간판 등 호구조사는 하지 않았다. 나름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또한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전히 인간관계에서 사전 예방 조치하는 습관을 버리는 건 어려웠다.
성인이 되면서 부모님이 이혼하거나 사별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만 겪어서 나 혼자 간직한 비밀스러운 일이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그동안 침묵으로 지내온 치열한 시간들이 뭔가 허망해지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굳이 왜 그렇게까지 나를 괴롭히며 살았을까? 최근 들어 이렇게까지 중독적으로 노력하며 살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곤 한다. 타인 중심적인 삶보다 내 안의 ‘나’를 더 아껴주었다면 흔히들 말하는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 오히려 단단한 맷집마저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은 각종 조건들이 양호할 때만 고답적인 관념에 빠지는 사치를 부린다던데. 혹시 지금 내가 그런 상태는 아닐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