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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Jun 14. 2024

'느긋'도 전염되나요?

 어느 비 오는 일요일 오후, 더 이상 우리를 따라다니지 않는 중학생 아들을 집에 두고 남편과 나는 집 근처로 산책을 나섰다. 산책 도중 미술관 옆의 작은 행사에 관심을 보이니 담당자가 나보고 먼저 전시관람을 하고 오란다. 이런 활동에 전혀 흥미가 없는 그와는 달리 관람 후 기쁜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유명한 작가의 동글동글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휴대폰 가방 하나가 내 앞에 순식간에 놓였고, 어떤 주저함도 없이 패브릭마커로 가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날씨 때문인지, 행사의 끝물이라 그런지 혼자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 행사 진행자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나를 기다리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후다닥 가방을 꾸미는데 왠지 나의 브런치 스토리 활동명을 쓰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로 승인받기 전, 한창 '느긋'에 꽂혀있을 때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월요일, 학교 출근 후 휴대폰을 넣은 이 가방을 야무지게 고 돌아다니니 우리 반 아이가 아는 척을 한다.


" 선생님도 OO미술관에 다녀오셨어요? "

" 응, 민수도 다녀왔니? "

" 네, 저도 이 가방 꾸몄어요 "

" 그랬구나! 너무 귀엽지? "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은 했지만 주말에 우리 반 학생을 마주치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학교에서 집이 그리 멀지 않아 언제든 어느 장소에서 아이들을 마주칠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직접 만나면 왠지 나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다. 더욱이 아이 혼자 미술관을 방문했을 확률은 희박해 민수는 분명 부모님과 같이 있었을 거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우리 반 아이를 우연히 보는 게 반가운 마음은 아주 잠시,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심지어 얼마전에는 학교에서 아주 멀었던 지역 축제를 갔을 때도 우리 반 아이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선생님!"하고 불렀다. 자연스레 아이와 같이 계시던 학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더 어색해지지 않게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났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봤을까?


 " 윤종아, 윤종이도 어제 에어쇼 봤어? 진짜 멋지더라. 그런데 선생님이 어제 선글라스도 끼고 있었고 사람들도 엄청 많았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선생님을 알아보았어?"

" 선생님 텀블러 보고 알았어요."


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다. 너무 웃겨서 빵 터졌다. 소리 내서 웃으니 아이들도 함께 따라 웃는다. 항상 내가 들고 다니는 애착 텀블러를 평소 눈에 담고 있었나 보다. 평소에도 꽤 똘똘한 친구였는데 역시 관찰력이 대단한 아이다. 주말이 끝난 월요일 아침 가끔씩 "선생님 어제 OO 가셨죠? 선생님 멀리서 봤어요!" 하는 아이들의 말에 가슴이 뜨끔한 적도 제법 많다. 괜히 (동네 비호감) 연예인병에 걸린 게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사람들 시선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줄 알았는데 학교 일만큼은 아직 멀었나 보다. 다른 건 괜찮은 데 밖에서 학부모를 만나면 아직도 많이 쑥스럽다. 나이, 결혼여부, 자식유무, 교직경력 등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별로 말을 하지 않는 편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아이들이 학기 초에 내 나이를 물어보면 예전에는 "선생님 몇 살로 보이는데?"라고 되물은 후 진짜 나이를 말해 주었을 텐데, 요즘에는 "선생님 100살이야." 농담을 하며 넘긴다. "선생님, 결혼하셨어요?"라고 학부모 상담 때 한 어머님이 물어보셨을 때도 "개인정보는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딱 잘라 사무적인 반응을 보인다. 요즘 상담 시간에 교사의 개인정보에 대해 묻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공개를 했다가 입소문이 퍼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하므로 미리 조심한다. 교직경력이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또는 자녀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말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를 아이들이 알면 자연스럽게 학부모님들도 알게 되고 거기에서 나오는 편견이나 생각은 이래 저래 유쾌한 것만 있지 않음을 경험으로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나의 예민한 성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여유롭고 무던한 성격의 선생님들은 학교밖의 학교생활에 별로 신경 쓰질 않아 보인다. 휴대폰 가방의 캐릭터처럼 동글동글 세상을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보면 인생 사는 게 좀 더 편할 텐데 그렇지 못한 나의 기질 자체가 오늘은 조금 아쉽다. 느긋하지 못한 성격을 가져 일처리가 빠른 것도 상당히 좋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느긋함을 내 생활에 끌어들이고 싶다. 겉으로만 보이는 느긋함이 아니라 단전부터 차오르는 진정한 느긋함을 갖고 싶다.




  항상 아이들에게 복도 통행, 계단 이용에 관한 안전지도를 틈틈이 하고 알림장에도 많이 적어주지만 에너지가 발에 있는 몇몇의 아이들에게는 그 본능을 통제하는 게 많이 어려운가 보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계단에서 장난도 치고 복도에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뛰어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안전상 마냥 귀엽게만 볼 수 없어 또 다시 안전지도를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고학년답게 우리 교실은 4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점심을 먹기 위해 1층에 있는 급식실까지 가려면 수많은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아이들이 손을 씻고 번호순으로 줄을 서 계단을 내려가는 데 오늘도 어김없이 두 세명의 아이들이 계단을 두 칸씩 내려가는 모습을 나에게 딱 걸리고 만다. 잠시 멈춘 후 무서운 표정으로 (아이들이 무서워할지 모르겠다. 전혀 아니겠지?) "계단에서 천천히!! " 강조를 하고 다시 가던 길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에 내 귓가에 들리는 한 아이의 목소리가 나를 풋- 하고 웃게 만들었다.

 

느긋하게!


 그 말을 듣고 나도 웃으며 혼잣말로 '그래, 느긋하게..'라고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내가 메고 다니는 휴대폰 가방에 그려진 그림과 낱말을 보았나 보다. 캐릭터가 귀엽다고 한 친구들은 있었으나 왜 느긋인지 아이들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또 언제 머릿속에 담아 두었을까? 아이들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는 옛말이 오늘따라 마음에 와닿았다. 어쨌든 이 말 한마디에 한숨을 내쉬었던 내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이렇게 사소한 일로 나를 많이 웃게 만드는 우리 반 아이들을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도 느긋함과 여유로움의 참맛을 알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언젠가 내 나이가 되면 깨달을 날이 오길 바란다. 우리 반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람에 대한 느긋함으로 번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그 느긋함에 전염되고 싶다.


 느긋함도 전염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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