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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Jun 12. 2024

내 아들은 외동아이

불편한 오지랖

 얼마 전 아는 선생님이 "부모님이랑 가깝게 살면서 왜 아이는 하나만 낳았어요?"라고 물었다. 우리의 어느 정도 친해진 관계를 볼 때 불편한 오지랖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나에게 물어본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겉으로 티는 안내려고 노력하지만 엄청 상처를 받았을 게 뻔하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질문을 받아도 마음 한구석이 더 이상 아려오지 않는다. "남편이 둘째를 별로 원하지 않았고 나도 아이 키울 때 너무 힘들어서 때를 놓쳤어요" 여유롭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드디어 둘째 질문 공격에 대한 엄청난 내공이 쌓인 것인가.  


 이런 단단함이 쌓이기까지 엄청난 간섭과 참견을 감수해야 했다. 정작 양가 부모님께서는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셨고 둘째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으셨지만 오히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기습적으로 공격을 받을 때가 많았다. 불과 몇 해전까지 같은 라인 00층의 자매 두 분을 만나면 유독 언니분께서 "자기 닮은 딸 있으면 엄청 이쁠 텐데... 하나 낳아요!"라며 불편한 관심을 보여주셨다. 그냥 웃고 넘기지만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지?' 거북한 느낌을 속으로 삭였다. 워낙에 오랫동안 봐오던 분들이라 허물없는 친근감을 보인 걸 수도 있지만 나에게 껄끄러운 말인 것은 확실했다. 그분들의 자녀 유무는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자매끼리만 같이 사시는 그분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만나기만 하면 내가 둘째(정확히는 딸이다)를 안 갖는 것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셨다. 진짜로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거고 그냥 관심으로 위장한 불필요한 오지랖이었을 것이다. 딸이 없는 나의 노후를 진심으로 걱정을 하셨던 분들이라면 이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은 그분들을 만나도 둘째를 낳으라는 소리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한 번은 가족 여행 중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셨다.


- (인자하게) 어디서 오셨어요?

- (웃으면서) OO에서 왔어요.

- 아이가 하난가?

- 네, 아들 하나예요.

- 아이고, 아이를 하나 더 낳아야지. 부모가 이기적이어서 아이가 외로운 거야!

- (정색하며) 할아버지, 요즘은 그런 말 하는 거 엄청 실례예요.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고 답하며 이 지역에 또 여행을 오더라도 이 식당에 다시는 방문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내가 진짜 둘째를 못 낳는 상황이면 어쩌려고 이 분은 말을 함부로 하시지? 이 외에도 시장을 가거나 심지어 아이 손을 잡고 길가에 있을 때조차 이런 질문들은 피할 수 없었다. "아들이 하나여? 빨리 하나 더 낳아. 엄마한테는 딸이 있어야지!" 같은 레퍼토리는 귀에서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웃긴 건 항상 둘째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남편은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30대 때 가끔씩 남편에게 "자기는 주변에서 둘째 낳으라고 하는 사람 없어?"라고 물으면 "내 주변에 아이가 하나인 사람이 엄청 많아. 나는 아이 하나만 낳길 잘했다고 생각하는데?"라며 나의 고민에 전혀 공감 해주지 못하였다. 솔직히 엄마로서 아이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둘째가 없는 것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작 아이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내 머릿속에 대한민국의 4인 가족에 대한 정형화된 가족 이미지가 뿌리 깊게 박혀 있던 시절이었다. 4인 가족의 구성원 속에 아들 하나, 딸 하나가 필수적이다. 만약 아들만 있다면 "딸 하나 낳아야지", 딸만 있다"아들 하나 낳아야지"라는 말이 여전히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특히 전자라면 더더욱.


 결혼 전에 나는 결혼을 하면 당연히 내가 아이 둘은 낳을 줄 알았다. 오만하게도 아이를 갖기 전에 외동아들을 키우고 있는 같은 학교 선생님께 내가 받았던 질문을 똑같이 던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나서 그분께 정말 죄송하다. 그때 그분은 "아이고, 힘들어서 둘째 생각은 진작에 접었어요"라고 하셨는데 내가 똑같이 경험할 줄이야. 인생은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느낀다. 아주 오래 텔레비전에서 다둥이를 키우고 있는 트로트 가수가 넷째를 임신한 채로 "아이 하나만 낳으려면 아예 낳지를 말아야 해."라고 단호하게 말것을 보았다. 그때 당시 나는 임신 전이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외동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참으로 속상하겠다는 생각을 짧게 했었다. 하지만 은연중에 가수의 말에 동의를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깊게 공감 하기가 어렵고 멋대로 판단을 한다. 인간은 정말 편협하다. 그 상황을 겪기 전까지는 나의 생각이 옳다고만 여겨 '그럴 수 있지' 마음을 먹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 누구도 누군가의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결혼여부, 자녀유무 등을 물어보는 것뿐 아니라 '빨리 결혼해야지, 살 빼면 진짜 예쁘겠네, 아이를 이렇게 키우면 안 되지' 등 불편한 오지랖만 주변에서 들려도 정말 고개가 절로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한마디로 답이 없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 아이를 갖고 싶은 사람에게 큰 돌이 되어 그들을 상처낼 수 있고, 진짜 몸이 아픈 사람에게 "피곤해 보인다"라는 말은 무례한 표현이라 생각하여 더 이상 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한 때 내 얼굴에 뾰루지가 나있으면 그걸 굳이 콕 집어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걸 지적하는 게 불편하다고 말을 하니 다음번에 만났을 때 나의 다크서클을 언급하는 웃긴 일도 있었다.  


 오지랖을 부리면 욕을 먹는 삭막한 시대가 되었다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관심이라는 가면을 쓴 지나친 오지랖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하다. 모른 척해주는 것이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위로가 될 수도 있다. 부모님을 만나면 이런저런 질문이나 오지랖을 남들에게 함부로 하지 마라고 항상 잔소리를 하는데 내가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심해야겠다.



 

 얼마 전 빨래를 게우며 남편과 함께 저출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가 나에게 갑자기 질문을 했다.


- 자기는 우리에게 아이가 왜 하나라고 생각해?

- (흥분하며) 자기가 육아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내가 덜 힘들었을 거고 우리는 둘째를 가졌겠지!

- (두 번째 손가락을 흔들며) 노노~ 아이가 하나만 있어서 우리가 지금 하고 싶은 거 다하며 살고, 삶의 만족도도 높은 거야.


 그의 말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이가 커서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자유의 몸이 되었고, 원래부터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사는 나름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기에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람마다 인생관이 달라 아이를 많이 낳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아이를 낳지 않아 행복한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아이를 많이 낳았던 안 낳았던 그게 아무리 가까운 사이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상대방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제 내 나이도 나이인만큼 어느 누구도 나에게 둘째를 낳으라는 오지랖은 부리지 않는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남들보다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 굴레에서 벗어나 40대를 즐기고 있는 내가 둘째를 못 낳아 자책하고,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해했던 30대의 나를 용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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