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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08. 2023

프라하의 봄

시어머니께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을 추천해 주셨었다. 언젠가 읽어봐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체코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프라하의 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윌에게 프라하에 있으면서 이 책을 같이 읽고 서로 느낀 점을 이야기해 보자고 권유했다. 그래서 윌은 영어판, 나는 한글판으로 각자 태블릿 PC에 다운로드하여서 함께 읽었다. 


프라하의 봄 사건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에  당 제1서기 알렉산데르 둡체크에 의해 시작된 민주화 운동이다. 1956년쯤 체코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 정권의 보수주의가 계속되고 있었고 60년대 이르러 체코 국민들이 공산주의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이런 자유주의 물결에 힘입어 둡체크라는 인물이 나타나 급진적 자유주의 개혁을 밀어붙인다. 그런데 자유를 갈망하는 체코 국민들을 가만히 뒀다가는 동유럽 다른 국가들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소련이 개입한다. 소련은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 국군 20만 명을 동원하여 체코를 침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1969년 4월 둡체크를 강제 해임 시켰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함으로 체코의 자유화 운동을 철저히 저지했다. 바츨라프광장에 많은 체코 시민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전차로 밀고 들어왔다.  

소련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체코인, 유대인들과 협력하여 나치를 몰아낸 동맹자였지만 1968년 냉전이 도래한 시대에는 자유화, 민주화를 간절히 원했던 체코인들을 억압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강요하는 나치에 이은 또 다른 압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프라하의 불씨는 거대한 권력 앞에 힘없이 꺼져버렸다. 

(나무위키, 네이버지식백과 참조)  

바츨라프 광장
바츨라프광장 중심에 있는 프라하 국립박물관


나는 우리나라가 생각났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한 후 5.18 민주화 운동 발생한 시점까지를 ‘서울의 봄’ 사건이라고 한다. 이것은 ‘프라하의 봄’을 빗댄 말이다. 비록 다른 나라와 싸운 것이 아니라 억압적인 우리나라의 정부와 시민들이 싸운 역사이지만, 자유를 위해 몸부림쳤다는 의미에서 두 사건이 겹쳐 생각이 났다. 그리고 체코는 우리나라와 참 많이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프라하의 봄 운동이 마치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얀팔라흐, 얀자이츠 두 청년은 1969년 1월에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자살했다. 체코 친구들이 말해주길 이들이 자살한 이유는 러시아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체코 국민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들의 몸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89년에 이 바츨라프 광장에 100만 명의 체코 시민들이 모여 무혈혁명을 하였고 마침내 성공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은 '프라하의 봄'이라는 억압받는 현실 속, 자유롭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 각각 성격이 다른 4명의 남녀가 펼치는 사랑 이야기를 토대로 인생에 대해,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각 인간의 삶과 연예의 모습을 가벼움, 무거움, 책임감, 자유 등의 대조적 개념의 키워드로 갈등을 묘사하며 인간 존재의 한계를 말하고자 하였다.

이 소설 속에 나는 무엇보다 사비나라는 인물에 동화되었다.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고 일주년이 되는 날 사비나는 파리의 시위 현장에 있게 된다. 젊은 프랑스인들이 주먹을 치켜들고 소련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외칠 때 소련에 점령당한 체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시위에 불쾌감을 느낀다.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더욱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깨달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점령당한 본인 나라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 테니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는데, 나는 이 대목이 이상하게 이해가 갔다. 

사비나는 또 우리는 군중의 눈에 자신을 맞추는 삶을 살기 때문에 거짓 속에 사는 것이라 말하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군중이라는 단어를 보고 앞서 묘사된 악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는 군중’. 그리고 갑자기 존 스튜어드 밀이 ‘자유론’에서 언급한 ‘다수의 횡포 tyranny of the majority’가 겹쳐서 떠올랐다. 소설 속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도 다수의 생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다수가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면 그 목적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도 횡포가 되기 쉽다. 사비나는 아무리 본인 나라를 위한 저항 운동이었지만 벌써 다수가 똑같이 합쳐진다는 것에 공포를 느낀 것이다. 사상이란 무엇인가? 유교 사상, 불교사상, 기독교사상,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도 생각해 보면 완벽한 사상은 아니다.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고자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낸 방법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일 뿐이다.  

모든 사상의 자체 목적은 개인을 위한 것임이 분명할 텐데 다수가 똑같이 생각하는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우리 개인은 얼마나 자유로웠는가? 이들로부터 얼마나 안전했는가? 행복했는가?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도망부터 가려는 사비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하지 않고 모두 놓아버리려고 하는 그 가벼움.  자유가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자유’라는 아름다운 두 글자만 앞세워 동경만 하면서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어 하는 나의 어두운 면모를 사비나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지금도 전쟁 중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참 평화로운 나라, 대한민국에 살면서 '나'라는 존재를 바로 알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수많은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들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좀비가 나타나거나, 지구의 종말이 오는 극한 환경을 설정하는 이유는 이런 제한적인 환경을 만들어서 죽음이 더욱 가까이 있는 상황에 우리를 반영해 보면서 인간 본질을 연구해 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영 연습은 분명 ‘나’를 알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 내가 사비나에서 ‘나’를 발견한 것처럼. 내가 자유가 극한으로 억압되는 일제강점기나 군부 독재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시대를 어떤 방법으로 견뎌냈을까?


지하철에서 내려 바츨라프 광장에 다다랐을 때 러시아 탱크가 이곳을 지나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비슷한 역사적 체험을 했기 때문일까? 나는 여행하는 내내 체코가 어쩐지 좀 슬퍼 보였다. 그리고 체코 국민에게도 연민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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