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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1. 2023

고스트 타운



헝가리에서 유학했던 윌의 한국인 친구가 부다페스트에 가면 발라톤 (Lake Balaton) 호수를 꼭 가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이 호수는 면적 596 km2, 길이 80km, 너비 10km, 평균깊이 4m로 중부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로 ‘헝가리의 바다’라 불린다. 때문에 발라톤 호수는 여름에 헝가리 주변 다른 유럽 국가에서 많은 여행객들이 온다고 한다. 나는 발라톤 호수를 처음 들어봤고 정보가 많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봤는데 발라톤 호수 인근 시오포크 (Siofok)라는 마을 주변에 호텔이 많은 것 같아서 일단 그쪽으로 호텔을 덜컥 예약했다.

우리는 당일 기차를 따로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기차역으로 갔다. 그곳은 어부의 요새 쪽에서 가까운 델리역(Deli)이었는데 공사 중이어서 기차역의 외관과 내부가 엉망이었다. 표를 사러 2층으로 올라가서 매표소 부스 안 앞에 줄을 서고, 표를 판매하시던 분에게 표를 샀는데 그분이 다급하게 외쳤다. 

“너희들 당장 뛰어가, 너희 기차 지금 떠나!” 

우리는 기차 스케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막 발급받은 티켓을 쥐고 있는 힘껏 뛰어 기차를 잡아탔다. 

“휴…….”

허겁지겁 올라탄 기차 안 좌석에는 따로 번호 같은 게 없어서 아무 좌석이나 우선 앉았다. 검표원분들이 돌아다니시며 티켓을 검사할 때쯤 우리는 그곳이 퍼스트클래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들 자리는 뒤쪽 칸이니 뒤쪽으로 옮기세요.”

한국에 무궁화호가 생각나는 기차 내부의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있다가 기차 안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화장실 앞에서 노크하고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다음 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에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차의 다른 구역을 옮겨 다니며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이 칸, 저 칸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며 화장실이란 화장실은 다 노크해 봤는데 모두 잠겨있었다. 포기한 채 내 자리와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돌아와서 입술을 꼭 깨문 채 한 십 분 정도 기다렸다. 십 분이 삼십 분 정도로 느껴졌다. 지나가던 역무원 한 분이 나를 보시더니 가지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어주셨다. 

“오, 감사합니다!” 

이곳은 역무원에게 말을 해서 열쇠로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하는 건가? 여행하다 보면 다양한 기차를 경험한다. 어떤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해도 자동으로 문이 열리지 않고 손으로 문을 열어야 하고, 어떤 기차는 화장실 문을 역무원에게 열어달라고 해야 한다. 나는 급한 불을 끄고 마침내 평온하게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지나 시오포크 역에 도착했다. 

시오포크 역은 아주 귀여웠다. 우리는 지하터널처럼 생긴 터미널을 빠져나와 예약한 호텔로 걸어갔다. 역에서 호텔까지 걸어서 약 5분 정도 걸렸다. 호텔에 체크인하고 들뜬 마음으로 주변을 탐색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마을을 나와 호수 쪽으로 걸어가는데 모든 상점들, 호텔들 문이 닫혀있었다.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갔을 때는 비수기인 1월 말쯤이었는데 이곳이 여름 휴양지라 그런지 거의 아무 곳도 운영하지 않았다.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마을을 걸어 다니니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날씨도 추웠지만 빈집들이 주는 서늘한 기운이 상당히 묘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다고 싫어했을 텐데,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으니 나의 눈은 ‘제발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빈 집들의 틈새로 샅샅이 쫓고 있었다. 

고스트 타운이라도 방문한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온 것이 아닌데 정말 황당했다. 더 큰 문제는 밥을 먹을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숙소로 다시 돌아와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현재 이 마을에서 식당 딱 한 군데가 문을 열었다고 했다. 이 근처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호텔 1층 레스토랑이었고 우린 지도를 받아 들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다행히 그 호텔 1층 레스토랑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아마 이 마을에 모든 사람들이 여기 있는 듯했다. 레스토랑 인테리어는 아시아의 어느 고급 사우나에 온 것 같은 모던하고 불교스러운 실내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호수 쪽 벽면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겨울의 얼어붙은 호수를 감상하면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적당한 중간 자리로 안내받고 윌은 치즈와 햄이 들어있는 돈가스를 주문하고 나는 헝가리 전통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어서 메뉴판에 나와 있는 전통음식 메뉴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주문했다. 조금 있으니 큰 접시에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노란색 떡처럼 생긴 콩알만 한 것들이 동그랗고 작은 케이크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한입 먹어보니 맛이 꼭 수제비 같았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 레스토랑 뒤쪽 편으로 호수를 보러 나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모자를 있는 대로 푹 뒤집어쓰고 실눈을 뜨고서 미친 듯이 불어오는 바람의 건너편 호숫가를 바라보았다. 호수 건너편 땅이 맨눈으로 보였다. 호수는 전체적으로 꽁꽁 얼어있었는데 호숫가 한쪽 귀퉁이만 살짝 녹았는지 잘게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파도와 함께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은 얼음조각이 햇볕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너울거렸다. 

호텔로 다시 돌아와서 이 고스트 타운에서 도대체 무엇을 봐야 할지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알고 보니 발라톤 호수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이 아까 우리가 호수 건너편에서 바라보았던 지역 중 하나인 티하니 (Tihany) 마을이었다. 보통 여기서 티하니 마을로 가는 보트를 탈 수 있는데 지금은 호수가 꽁꽁 얼어서 불가능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티하니 마을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구글맵으로 검색을 해 보니 이곳에서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3시간 정도를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3시간? 말도 안 돼… 이렇게 내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인데…….’ 

그때 시간이 오후 3시 정도였고 티하니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해가 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고 숙소에 가만히 있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구글 지도로 이 주변에서 갈 만한 곳을 검색해 본 후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찍어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저마르디(Zamardi)라는 지역에 쾨헤기 전망대(Kőhegyi Kilát)라는 곳을 찾았다. 호수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멋진 곳이라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저 마르디라는 곳에 내린 후 걸어서 25분 정도 가면 된다고 하는데 마침 오후 4시에 시오포크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시오포크 기차역에 버스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시간 맞춰 기차역으로 다시 돌아가 버스를 탔다. 그리고 저마르디 역에 내린 후 작은 마을의 길을 걸었다. 


인기척도 없고 불빛도 없는 텅빈 집들

이곳도 사정은 마찬가지, 모든 집들이 텅텅 비어있었다. 우선 주차장에 차들이 별로 없었고 해가 어스름하게 지는데 모든 집의 방들에 불이 꺼져있었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집들 사이를 끝도 없이 걸어가는데 마치 전쟁이 나거나 아니면 전염병이 돌아 모든 사람이 도시 밖으로 탈출한 곳에 이방인 두 명이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이곳은 지금 우리 둘, 그리고 귀신들밖엔 없다. 주택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집들이 있는 곳을 직진해서 한참 걷다가 좌측으로 꺾어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은 오르막길이었고 숨이 차도록 한 십 분 정도 걸으니 아담한 크기의 등대 하나가 나타났다. 




전망대였다. 전망대의 계단을 오르니 상상도 하지 못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졌다. 광활한 들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귀여운 집들 그리고 그 너머에 길쭉하게 수평으로 펼쳐진 호수, 그리고 호수 건너편에 티하니 마을까지 보였다. 때마침 노을이 져서 모든 세상이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엄청 세게 불어 몸이 날아가지 않도록 난간을 세게 잡아야 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경치를 눈에 더 담으려고 금방 내려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뜨거웠던 해가 있는 힘껏 다하여 마지막 빛까지 쥐어짜고 나서 붉은 여운의 하늘이 펼쳐졌다. 우리는 해가 지고 나서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에 가득 품고 나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져 레스토랑을 검색했다. 호수 가까이에 피자가게 한 군데가 다행히 문을 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호수까지 한 삼십 분 정도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가서 피자가게가 있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호수 건너편 티하니 마을 쪽은 몇 군데 불이 켜져 있었다. 

피자가게로 들어가니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사장님이 놀란 표정으로 얼떨떨하게 우리를 맞았다. 윌이 좋아하는 페페로니 피자를 주문하고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주문한 음식은 빨리 나왔고 배가 고파서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이 다 먹어 치웠다. 배를 채운 후 듬성듬성 가로등이 있어 무척이나 깜깜한 시골길을 부지런히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하루 종일 매섭고 강한 겨울바람에 바들바들 떨다 온 우리는 숙소에서 도착하자마자 녹초가 되었고 말도 없이 씻고선 뻗어버렸다.  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끔 관절염으로 말썽을 부리는 허리와 무릎이지만 오늘 잘 버텨주어 뚜벅뚜벅 걸어서 부지런히 잘 보았다.


따뜻한 한여름에 푸르고 아름답게 빛나는 발라톤 호수를 바라보며 초록 잔디에 누워 일광욕이나 해수욕을 즐기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오포크나 티하니마을 하면 떠올라야 할 이미지와 정반대 되는 것들을 경험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섬뜩한 고스트 타운을 온종일 걸어 다니는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보겠는가? 돈을 주고서도 하지 못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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