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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14. 2023

아드리아해의 진주



누군가가 나에게 동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고 싶은데 어느 도시를 추천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두브로브니크(Dubrovnik)라고 말해주고 싶다.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해의 진주(Pearl of the Adriatic)로 불리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이고 스플리트에서 버스로 4시간 반에서 5시간 정도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우리는 카스텔에서 온화하고 정적인 두 달을 보낸 후에 두브로브니크를 3일 정도만 들렀다가 몬테네그로의 코토르라는 도시에서 2주를 보내기로 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었지만, 이 도시는 여행 정보를 찾는 내내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따라오는 키워드가 ‘살인적인 물가’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한량처럼 돌아다닐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고 딱 3일만 숙박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두브로브니크 도시를 꼭 두 눈에 담으라고 추천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경관에 입이 딱 벌어지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곳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맑고 푸르게 빛나는 바다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중세도시의 모습은 정말 특별하다. 그래서 이 도시는 돈을 아끼려고 한 끼를 건너뛰거나 빵 한 조각에 배를 채우며 다니는 배낭여행으로 오지 말고 돈 걱정 없이 제대로 먹고 제대로 쉬는 신혼여행으로 오면 제격일 것 같다. 


두브로브니크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과 상반되게, 사실 아픔이 있는 도시이다.  1667년에는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복구하고 나서는 1991년 유고 내전 시 또 많은 곳이 파괴되었다. 다행히 유네스코의 도움을 받아 예전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지진과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가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예전 모습 그대로 복구를 잘해놓았다. 


첫날은 어스름 해가 질 무렵 도착해서 숙소에서 자기 바빴고 다음 날이 되어서야 구시가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구시가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총 3개의 입구가 있다. 숙소에서 계단을 내려온 후에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7분 정도만 걸으면 필레 게이트(Pile Gate)가 나온다. 

이 필레 게이트는 가장 큰 출입구이자 구시가지 관광의 중심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오노프리오 분수(Velika Onofrijeva Fontana)가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서부터 맞은편 루자 광장까지 280m 직선으로 거리가 뻗어져 있다. 오노프리오 분수는 성 사비오르 성당 맞은편에 있는 분수로 1448년 오노프리오 데 카바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최초의 식수원이라고 한다. 성벽에서 생활할 때 식수가 항상 문제였고 이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12km 떨어진 옴블라랑 강에서 물을 끌어와 분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분수의 16면에 제각각 사람 얼굴이나 동물 모양 얼굴을 하고 있고 입에서 물줄기가 나오게끔 되어있다. 분수 앞에 성 그리스도 성당과 프란체스코 수도원(Franciscan Church and Monastery)이 있는데 이 수도원은 약국으로 1317년에 문을 열었다는 설이 있다.  

스트라둔 거리(Placa Stradun)

이 분수로부터 루자광장까지 이어진 거리를 스트라둔 거리(Placa Stradun) 혹은 플라차 거리(Placa Street)라고 하는데 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중심 거리이다. 거리를 뜻하는 이탈리어인 ‘스트라다’에서 유래하여 ‘스트라둔’(Stradun)이 되었다고 한다. 석회암 도로로 쭉 깔려 있는데 반질반질 윤이 났다. 

스트라둔거리 끝에  종탑이 하나 서 있는데 의회의 소집이나 위험 혹은 두브로브니크 소식을 알리는 용도였다. 높은 종탑이 반지의 제왕 ‘사우론의 눈’처럼 분수 앞에 서 있는 여행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거리의 양쪽에 건물들이 쭉 들어서있고 건물들의 1층에는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기념품 가게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리고 길을 걷다 보면 직사각형 건물들 사이사이에 좁고 가파른 골목들이 스트라둔 거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루자 광장에 다다르면 멀리서 보였던 루자의 종이 선명하게 보인다. 종탑의 중간에 동그랗게 시계가 있는데 시곗바늘이 해의 모양과 닮아있다. 이 디자인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판타지 세상에만 있을 것 같은 신비로움을 준다. 사실 이곳은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킹스랜딩’이라는 도시의 배경이 된 곳이다. 킹스랜딩에 촬영분이 이 도시 곳곳에서 제작되었는데 도시는 마치 판타지 대작이 이런 도시에서 나오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루자광장 부근에는 시계탑 옆에 폰타게이트, 옆 작은 분수대와 함께 성블라호 성당, 스폰자궁, 시청, 오를란도브 기둥이 있다. 오를란도브 기둥은 라구사 공화국의 자유 독립 정신을 상징하는 기념물로 정부에서 새로운 법령이나 규칙이 제정되면 이곳에서 시민들에게 공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밖에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총령의 집무실이 나온다. 옛날 두브로브니크는 왕이 없고 귀족, 시민, 기술자만 있었는데 14세기부터 선출된 총령은 급여도 없고 임기가 1개월이었으며 이 집무실에서 오직 공무만 생각하며 지냈다고 한다.

우리는 왕좌의 게임 드라마에서 세르세이 왕비가 알몸으로 ‘쉐임’을 당하며 내려온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계단 위에는 제법 규모가 큰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이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갈했고 예배당 안쪽에 돔 천장이 있는 부분에 가서야 성모가 승천하는 화려한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은 현지어로 ‘Katedrala Velike Gospe’, ‘Katedrala Marijina Uznesenja’라고 하는데 둘 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모승천 대성당이라고도 한다. 이 성당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이 근처에서 조난했다가 살아남으면서 이곳에 대한 감사함으로 성당을 지어 헌납했다고 한다. 12세기 때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어졌지만 1667년 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이후 이탈리아 건축가 버팔리니에 의해 바로크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사실 동유럽 내내 수도 없이 보아온 성당이라 이쯤 되니 나는 성당에 아무 감흥이 없었다. 


두브로브니크 대성당


골목골목마다 타버릴 것 같은 태양을 피하고자 차양을 내리고 야외에 테이블과 탁자를 꺼내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성당에서 내려온 바로 그 계단 앞에 한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확인해 보았다. 음식 가격은 한 끼에 15,000원~25,000원 정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더 비싼 메뉴들도 많았지만 가장 저렴한 햄버거를 주문하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 시켰다. 나는 이렇게 옛 골목에서 밖에 앉아 식사하는 것이 참 좋다. 햇볕은 차양이 막아주고 바람이 선선하게 불면서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가 나와 입을 즐겁게 해 주거니와,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식사하는 표정을 보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첫날은 이렇게 구도심을 둘러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저녁에 숙소로 가는 길에 작은 피자가게에 들러 피자를 먹었는데 윌은 지금도 그곳에서 먹은 피자를 이야기한다. 나는 크로아티아 카스텔 숙소 근처에서 먹었던 피자가 가장 맛있었는데 윌은 이곳 피자가 세상에서 가장 가장 맛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같은 곳을 여행하는데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항상 흥미로웠다. 윌의 버전으로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 탄생할까? 



다음날은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를 걸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있는 내내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 기온은 20도 정도였고 그래도 바람은 아직 쌀쌀했지만 여기저기서 모여든 관광객들은 하늘하늘한 여름 원피스, 샌들,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다녔다. 

두브로브니크 성벽(Walls of Dubrovnik)은 성벽 높이 25m, 두께 3m, 길이 2km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10세기부터 짓기 시작해 15세기에 완공되었다. 1991년 유고 내전 시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유네스코 지원을 받아 오늘날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총 세 개의 입구가 있는데 어제 들어왔었던 오노프리오 분수가 있었던 필레 게이트를 시작으로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성벽은 구시가 마을 자체를 바닷가 절벽 위에서부터 폭 감싸고 있었는데,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그 성벽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다. 입장료가 250쿠나로 당시 환율로 44,000원 정도 되는 사악한 가격이라 진정 성벽을 둘러봐야만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해 두 사람의 입장료를 지불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멋진 선택이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를 걸을 때 풍경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를 걸을 때 풍경


성벽에 오른 시작부터 오렌지빛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벽을 따라 높이 올라갈수록 성벽 바깥으로 새파란 바다와 성벽 안쪽으로 낡은 오렌지색 지붕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모습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선사하는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가 없다. 그야말로 눈 호강이다. 중세의 도시가 한눈에 쏙 들어와 있다. 

성벽 곳곳에 카페들도 있었다. 걷다가 목이 마르거나 쉬고 싶으면 카페에서 맥주 한잔 시켜서 마시면서 경치를 감상하면 된다. 성벽을 걷는 도중 작은 아치형 문이 하나 나왔는데 이곳이 바로 부자카페(Buza bar)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여기서 부자란, 부유하다의 ‘Rich’가 아니라 작은 통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Buza’라고 한다. 절벽을 따라 카페가 아슬아슬하게 딱 붙어있었고 안전장치 없이 철로 된 손잡이 몇 개로만 절벽을 내려가서 카페에 도달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내려가다가 올라오는 손님과 만나면 구석에서 한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할 만큼 좁았다. 절벽 위에 아찔하게 마련해 놓은 카페가 상당히 이국적이었다. 

부자카페(Buza bar)


성벽을 걷고 나서 메인 거리에서 좀 벗어나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신비스러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좁은 골목길 사이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었는데 저마다 식탁과 의자를 밖으로 꺼내놓고 예쁘게 꾸며놓았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아기자기한 식당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번에 나는 해물 리소토를 주문했다. 나중에 몬테네그로 코토르에서 만난 영국 커플이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들은 두브로브니크에서 동유럽 내내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최고급 퀄리티의 해산물을 맛보았다고 했다. 두브로브니크에서는 햄버거가 아니라 해산물을 먹어봐야 한다. 하긴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가 아닌가!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슈퍼에서 와인 한 병을 샀다. 돌아온 숙소에서 테라스에 앉아지는 해를 바라보며 함께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와 도시를 바라보았다. 와인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분위기에 취한다.


셋째 날은 두브로브니크에서 유명하면서도 걸어서 갈 수 있는 해변 딱 두 군데를 가보기로 했다. 플라자 스베티 자코브 비치(Plaza Sveti Jakov beach)와 반예비치(Banje Beach).

반예 비치 (Banje Beach)는 구도심을 통과해 플로체 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갈 수 있다. 성곽을 벗어난 지대가 높아서 반예비치가 펼쳐진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눈부시게 빛나는 청량한 쪽빛 바다와 멀리 보이는 마을, 그리고 해변에서 쉬는 사람들의 시각적 조화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랬다. 사실 두브로브니크는 어디서 풍경을 보든 그야말로 예술이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한참 서서 경치를 관람한 후에야 좁은 계단을 통해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반예비치(Banje Beach)


해변에는 많은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일광욕을 즐기며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아, 수영복 가져올 걸…….’ 추워서 수영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우리는 수영복을 입고 와서 여유롭게 해변을 즐기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일 다시 수영복을 입고 반예비치로 오자고 윌에게 이야기했다.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우리는 다음 해변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플라자 스베티 자코브 비치(Plaza Sveti Jakov beach)로 가는 길도 예술 작품이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뒤로하고 해변을  향해 걸을 때 조용한 도로를 따라 시골길을 걷게 되는데 오른쪽은 절벽 아래 짙푸른 바다이다. 청초하게 맑고 푸른 바닷가 절벽에 사이프러스 나무의 울창한 숲과 거대한 저택이 중간중간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해변을 도착한 것은 아닌데 가는 길에 좁은 계단이 아래로 나 있길래 호기심에 내려가 보기로 했다. 역시나 여기서도 기가 막힌 경치에 혀가 내둘러졌다. 오른쪽으로 절벽이 움푹 들어가 동굴처럼 보이는 지형으로 카약 액티비티를 하는 그룹이 보였는데 파란색 바다와 노란색 카약의 선명한 대비가 명쾌하고 산뜻했다. 

다시 가던 길로 돌아가 마침내 플라자 스베티 자코브  해변에 도착했다. 


두브로브니크 플라자 스베티 자코브 비치(Plaza Sveti Jakov beach)

구시가지가 오른쪽으로 더 작게 보이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바닷가 모습을 보였다. 한 번 더 좁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는 지중해 바닷물은 투명하고 깨끗했고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시원했다. 군데군데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맥주를 판매하는 작은 매점이 있었는데 가격이 아주 비싸지는 않았다. 우리는 각자 맥주를 한 병 사서 마시면서 경치를 감상했다. 아늑한 이 해변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두브로브니크의 마지막 날은 한가로이 즐기지 못했던 반예비치로 다시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다음 여행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몬테네그로로 가는 버스가 오후 6시쯤 출발했는데 체크아웃을 일찍 하면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에어비엔비 호스트에게 혹시 체크아웃 시간을 연장할 수 없는지 물어봤는데 다행히 그날 체크인하는 손님이 없다며 흔쾌히 그 시간까지 있다가 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런 일이 잘 없는 데 정말 행운이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가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에페스 맥주를 4캔 샀다. 스카프, 모자, 비키니, 선글라스, 스피커, 맥주! 준비 완료! 적당한 곳에 스카프를 깔고 앉았다. 스피커로 다운로드한 노래를 틀고 맥주를 마시며 바다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어제 걸었던 성벽이 보였다. 이 해변은 지금까지 내가 갔던 해변 중 정말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해변이다. 사람들도 많이 붐비지 않았고 모두 여유 있는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두 명의 여성이 우리 가까이로 다가와 비키니의 탑을 풀어헤쳤다. 그 말로만 듣던 탑레스(topless)! 가슴 두 쪽이 자유롭게 출렁거렸다. 그녀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시간을 즐겼다. 나의 감춰야만 하는 부끄러운 부분을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노출하면 얼마나 해방감이 느껴질까? 보면 실례되는 줄 알면서도 너무 신기해서 선글라스 너머로 슬쩍슬쩍 훔쳐봤다. 내가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녀들의 자유가 이내 부러웠다. 

두브로브니크 반예비치(Banje Beach)


사람들이 한가로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고 바깥 온도도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더웠기 때문에 나도 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그런데 얼음장 같은 바다 온도에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앗, 차가워! 이게 뭐야!” 

어떻게 다들 수영하고 있었던 거지? 유럽 사람들 피부는 좀 다른가? 이들이 느끼는 추위는 우리랑 다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태연하게 수영을 할 수는 없다. 적어도 물에서 나오면서 부르르 떨어야 하는 게 정상이라고 보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난 물에 들어가기를 그만두었다. 

여유를 다 부리고 슬슬 체크아웃할 시간이 되어 숙소로 돌아갔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못한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스르지산 올라가서 노을 보기. 전망이 매우 좋다고 한다. 가장 높은 곳인 스르지산 전망대에 올라가 구도심과 새파란 아드리아해 한눈에 담을 수 있으니 다음에 간다면 꼭 한번 들러보고 싶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 또 언제 이곳에  올까 싶어서 한번 갔을 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오려는 경향이 있다. 나도 기왕 마음먹고 온 김에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보고, 하고 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여행하다 보니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 여행지나 나의 사정으로 못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예를 들자면 독일에 어떤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작은 옷 가게들은 한국에서 받아 온 영문 백신 증명서를 인정해 주지 않아서 안 들여보내 준다거나, 부다페스트 세체니 다리를 걸어 보고 싶었지만 한 달 넘게 공사 중이라서 가보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공연을 보러 갔는데 신분증을 깜빡하고 가서 입장을 못 한다거나 하는 것들. 한껏 기대하고 갔다가 그럴 때면 어깨에 힘이 쭉 빠져버리지만, 또 그러면서 많은 걸 배운다. 배테랑 여행자도 어딜 계속 다니다 보면 어이없는 실수로 중요한 것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 항상 긴장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배울 수 있다. 세상엔 내가 철저히 준비한다고 해서 모두 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수용과 체념의 것들. 간혹 이러다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기도 하게 된다. 그 예상치 못 한 일이 좋든 나쁘든 대체로 이런 경우가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김영하 작가님은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이것을 ‘추구의 플롯’이라 설명하셨다. 추구의 플롯이란 주인공이 원래 추구했던 표면적 목적을 이루지 못했지만, 결말에 이르러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외면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간절히 원했던 것을 달성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예상 밖의 여러 사건을 만나면서 ‘나’라는 인간을 좀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적인 간절히 원했던 것이 뭔지도 모르고 달성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계획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문제들이나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서 현재에 나를 잘 알게 되었고, 그런 사건들은 항상 교훈을 주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느끼며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생각도 못했을 텐데, 아쉬움이 하나 남겨진 여행지도 꽤 낭만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걸 못하다니’라는 분한 생각보다 ‘나중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되면 이런 걸 해봐야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니 이 여행지가 더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렇게 이곳에도 아쉬움 하나 남겨놓고 다음 여행지의 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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