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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07. 2023

유럽 가던 날


 나이 마흔한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다들 유럽 배낭여행을 갈 때 나는 호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할 때는 휴가를 짧게 쓸 수밖에 없어서 유럽에 갈 시간이 없었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한 도시만  갔었으면 되었을 텐데 한번 갔을 때 다 둘러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여행을 미뤘다. 언젠가는 가보겠지. 이렇게 유럽에 가고 싶은 나의 욕망은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며 마흔이 넘게까지 미뤄졌다. 

2021년 가을 캐나다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면서 기왕 여행을 나선 김에 미뤄왔던 유럽과 주변 국가들을 여행하고 오자고 윌과 상의하고 결정하였다. 첫 유럽 여행지로 독일을 선택한 이유는 12월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12월에 독일 드레스덴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글뤼바인 (Gluhwein)을 한 잔 맛보는 것이었다. 글뤼바인은 추운 겨울 오렌지 껍질이나 시나몬 스틱을 와인과 함께 넣고 끓어서 따뜻하게 마시는 와인을 말하는데, 프랑스에서 뱅쇼(Vin Chaud), 미국에서 뮬드와인(Mulled wine)이라고 한다. 그리고 윌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베를린 클럽에 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드레스덴에서 가까운 독일의 베를린에 머물기로 했고 여유 있게 천천히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한 달 예약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처음으로 유럽 가던 날 우리는 독일 베를린행 비행기에 탑승을 금지당했다. 독일로 어렵게 출국한 후에도 코로나19로 축제가 취소되어 나는 드레스덴 크리스마켓에 가지 못했고 클럽은 문을 닫아 윌은 베를린 클럽에 가지 못했다.


캐나다에서 베를린으로 출국하던 날 가족과 친구들에게 모두 인사를 하고 토론토 피어슨 공항 에어캐나다 카운터에 줄을 서고 짐을 부치려고 할 때였다. 항공사 직원이 백신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해서 우리 둘 다 보여줬는데 남편의 백신 증명서를 보고 딴지를 걸었다. 남편은 캐나다에서 화이자 백신을 두 번 맞았고 언제 어디서 두 번 맞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나와 있는 온타리오주 정부에서 인증된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이 서류를 내밀었는데, 에어캐나다 쪽 직원 말에 의하면 서류에 QR코드가 없어서 탑승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정부 발급 서류임에도 불구하고 남편 서류에 QR코드가 없었던 이유는 오랫동안 한국에 살고 있어서 캐나다 의료보험 카드에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었고 이 때문에 QR코드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항공사 측과 이야기하며 ‘백신을 두 번 다 맞았다는 증명이 버젓이 이렇게 있는데 이깟 QR코드 하나 없다는 서류상 문제 때문에 비행기에 탑승 안 시켜주겠어?’라고 설마 하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설마’는 현실이 되었고 우리는 탑승을 거부당했다. 

백신을 맞았거나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 보다 각 나라의 국경에서 요구하는 종이쪽지와 그들의 행정 사무처리 방법에 따라 우리들의 발은 묶일 수 있었다. 어떤 나라 국경은 교차로 백신을 맞으면, 백신을 두 번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입국시켜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스트라제네카로 첫 백신을 맞고 화이자로 두 번째 맞으면 입국이 불가했다. 어떤 곳은 백신을 맞은 나라가 다를 경우 입국에 문제가 생겼다. 윌 친구는 유럽에서 첫 백신을 맞고 캐나다에서 두 번째로 맞았는데 다른 나라 국경을 넘어갈  때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공항을 나와 입국 거부당한 사정을 설명한 후 윌 동생 집에서 잠시 머물며 QR코드가 나와 있는 서류로 다시 발급받기 위해 여기저기 정부 기관에 전화를 돌린 후에 결국 그 서류를 받았다. 


 산 넘어 산이라고, 이번엔 한국에서 예매한 비행기 티켓 날짜를 바꾸기 위해 항공 티켓을 예매한 여행사와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에어캐나다에서는 ‘항공사에서 탑승 거부를 한 거라 날짜만 바꾸면 된다’라고 했는데, 항공권을 예매한 한국 여행사에서는 ‘우리 여행사 시스템에는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한 사유에 노쇼(No Show : 승객이 나타나지 않음)라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기 때문에 정책상 비행기 티켓을 환불해 줄 수도 없고 날짜를 바꿔 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간청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더 이상 그들을 상대로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답답하고 속이 상했다. 여행사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잔뜩 화가 났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이 시국에 여행을 떠나기로 한 우리가 자초한 일인 것을.

나는 에어캐나다에 다시 확인해 보려고 전화해 봤지만,  대기시간이 3시간인데 기다릴 거냐고 물어보는 메마른 여자 로봇의 목소리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다시 공항에 찾아갔다. 공항의 에어캐나다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우리 상황을 이야기하고 ‘노쇼(No show)’라는 메시지가 시스템에 남겨진 것이 맞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 직원은 컴퓨터의 키보드를 신중하게 두드려 보고서 한참을 뒤적거고 나서 말했다.

“어디에도 그런 메시지는 없어요. 그냥 날짜만 바꾸면 되는데 에어캐나다를 통해서 예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예약을 한 여행사를 통해 날짜를 바꾸어야 합니다.”

힘이 빠졌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를 보고 그 직원이 다시 말했다.

“이곳에서 제가 도와드릴 방법은 없어요. 공항 왼쪽 끝으로 가면 에어캐나다 직원과 직접 통화 가능한 전화 부스가 있으니 그곳에서 전화를 걸어 항공권 날짜를 변경해 달라고 직원에게 사정해 보세요.”

여행 시 코로나19와 관련해 어떤 어려운 상황에 닥쳐도 이에 대해 무엇이든 달게 감내할 마음을 가지고 떠났었다. 왜냐하면 여행을 떠나 궁극적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런 어려운 시기라도 결국 사람은 살아가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유럽에 발도 디디지 않았는데 사건이 터져버렸다. 우리는 끙끙거리며 이 사건을 해결해 보려 발버둥 쳤다. 에어캐나다 직원이 알려준 곳으로 가니 다섯 대쯤 차례대로 전화 부스가 놓여 있었다. 통화 대기시간이 긴 탓에 몇몇 사람들은 전화 수화기를 들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우리는 수화기 하나를 집어 들고 에어캐나다로 연결되는 번호를 눌렀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로 남자 직원의 목소리가 힘없이 대답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한 뒤에 간절하게 사정했다. 마법의 단어 ‘제발이요(Please, 플리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다.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에어캐나다 직원분은 ‘원래 규정은 안 되는데…….’라고 운을 떼시면서 우리 비행기 날짜를 바꿔주셨다. 

그리하여 가까스로 공항에서 쫓겨난 지 일주일 만에 베를린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시작부터 코로나19 시대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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