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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07. 2023

정의란 존재 하는가?



 토론토에서 윌 친구가 하우스 파티에 초대하여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저녁을 함께 만들어서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서재에 한가득 꽂혀 있는 법에 관련된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의 남편은 변호사였는데 나는 혼자 있는 그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물어보았다.


“너는 이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생각해? ”

그는 난데없이 이 세상에 정의가 존재하는지 물어보는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그는 대답해 주었다.

“아니, 이 세상에 정의는 없어. 법만 있을 뿐이야. 그리고 법은 정의가 아니야.”


나는 정의가 간단한 것인 줄 알았다. 나쁜 짓 한 사람 있으면 벌 받게 하고 나쁜 짓을 못 하게 하는 것. 그런데 문제는 그게 나쁜 짓인지 아닌지 심판 하는 것도 사람이고 벌을 주는 것도 사람인데 우리는 과연 한 사람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정도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사건이 발생하면 항상 서로의 입장이 있게 마련인데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나쁜 짓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나쁜 짓을 해도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데 그렇다면 법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1988년 10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지강혁과 죄수들이 호송차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가정집을 돌며 인질극까지 벌인다. 그렇게 9일째 되는 날 한 가정집에 숨어있던 일당들이 경찰과 대치되던 그때 그가 외쳤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

비단 1988년의 일뿐만 아니라 지금도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죄의 대가를 가볍게 받거나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 검찰들은 살인을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는다는 말은 지나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로 정말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어떤 죄를 저질러도 요리조리 법망 이용해 빠져나온다. 나는 이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의’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인 마이클 샌델스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도 읽어봤다. 많이 어렵지 않게 잘 풀어서 써 놓으셨지만, 나의 궁금증이 본질적으로 해결되진 않았다. 


하루는 윌에게 물어보았다.

“윌, 너는 이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자 그는 말했다.

“정의는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고 생각해. 너는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

난 가볍게 생각하고서 대답했다.

“억울한 일 당하지 않는 것. 그게 정의 아냐? 사람이 서로 양보해 가면서 함께 살려면 억울한 일이 없어야 하잖아. 내가 한 대 맞으면 나도 한 대 치고 싶고 누가 내 것 뺏아가면 돌려받고 싶은 거 아냐? “ 

“그러니까 네 말은 누가 너를 한 대 치면 네가 그 사람을 직접 처벌해야 정의롭다는 거야?”

“뭐……. 그렇게 되나?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은데? 아니면 법이 그 사람을 잡아서 해결해 주거나.”

“그렇지. 근데 예를 들어 네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어느날 도둑이 들어 네 물건을 몽땅 훔쳐 갔다고 치자. 그런데 경찰이 그들을 잡지 못했어. 그럼, 이 상황에선 어떤 마음이 들까 ?”

“억울하지. 도둑을 못 잡으면 손해 봤다고 생각하고 엄청나게  삶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

“그럼, 그 도둑은 못 잡았는데 갑자기 보험 회사가 큰 돈을 너에게 주어 도둑이 들었을 때 보다 더 삶이 나아졌어. 그럼, 이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

“그건 좋긴 하겠지만 도둑 못 잡아서 찜찜한 건 마찬가지야. 보험회사가 나한테 돈을 준 건 별개 사건으로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래,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윌은 약간 뜸을 들이고서 다시 말했다.

“그럼 그 도둑이 영영 잡히지 않았어. 그런데 도둑이 다른 도둑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죽었어. 그럼, 이제 너의 억울함이 좀 풀릴까? 경찰도 해결 해 주지 못하고 법도 해결해 주지 못한 ‘그 도둑놈 처벌 받는 행위’를 다른 사람이 한 경우면 어때?”

“아니, 뭐 그렇게 까지……. 그가 죽기까지 바라진 않아.  그래도 인과응보라는 생각은 들것 같아.”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엔 애초에 정의라는 것은 없어. 하지만 사람들은 늘 억울한 일을 당하지. 그래서 덜 억울하게 ‘정의’라는 개념을 만든 거야. 그래서 종교도 생긴 거지. 인도에서는 ‘Karma카르마(업보)’라는것을 통해서 나쁜 짓을 하면 자신에게 돌아간다고 믿음으로서 내가 안 좋은 일을 당하면 법이 처벌하지 않고, 내가 처벌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은 업보를 통해 처벌받게 되어 있다는거야. 그렇게 믿어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으니까. 천당과 지옥도 마찬가지야. 기독교에서 나쁜 짓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잖아.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라도 편하거든. 그럼 내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거거든. 그래서 정의라는 개념을 잘못 한 사람이 나에 의해 처벌받는 행위라고 좁은 의미에서 규정 해 버린다면 그 사람에겐 정의가 없을 수 있다는 거지. 난 그렇게 생각해.”


 윌 생각이 전부 맞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리는 있었다. 시대의 악인 스탈린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눈도 끔쩍하지 않고 죽였지만 75세가 될 때까지 장수하면서 잘 먹고 잘살다 가셨다. 이런 걸 보면 애초에 없었던 정의를 내가 정말 찾고 있는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나도 내 삶을 살아가는데 좀 덜 억울해지려면 없는 정의를 만들어 내서 이 세상 어딘가에 실현이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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