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디뎀이 빵을 잔뜩 사 왔는데 빵이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동유럽 여행하면서 독일에 트랜디한 빵집에서 기가 막힌 빵을 먹어본 후로 맛있는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희한하게 튀르키예의 빵은 다 맛있었다. 촉촉하고 쫀득쫀득하면서 가격도 매우 저렴했다. 튀르키예 정부는 국민들이 굶주리면 안되기에 각 지역마다 빵집을 두는 것을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유럽의 빵이 아니라 튀르키예 빵이 더 맛있다니, 신기하다!
그리고 어느 날 윌, 팀과 함께 이스탄불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하필 그날은 라마단이 끝나는 연휴여서 정말 사람이 많았다. 라마단은 천사 가브리엘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이슬람교도들은 이 라마단 한 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을 하고 하루에 5번 기도를 한다. 물도 마시면 안된다는데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일하면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이렇게 한 달 동안 지낸다고? 배고픈 건 참기가 정말 힘든데 이슬람교도들은 대단하다. 우린 지하철 어느 역에 내린 후 페리를 타고 이스탄불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다. 지하철로도 갈 수 있었지만 팀이 우리에게 페리를 타고 배 위에서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배를 타기 전에 시미트(Simit)라는 동그란 빵을 하나 사서 간식으로 먹었다.
페리에서 내린 후 팀에게 아직 배가 약간 고프다고 했더니 그는 우리를 미디예(Mideye)를 파는 곳으로 데려갔다. 미디예 돌마는 홍합밥으로, 쌀과 야채를 양념에 잘 버무린 후 홍합 안에 넣고 쪄서 파는데 튀르키예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었다. 한 버킷을 주문하니 신선한 레몬 반쪽이 따라나왔다. 홍합 뚜껑을 열고 밥으로 가득 찬 통통한 홍합 위에 레몬즙을 쭉 짜서 한입에 쏙 넣어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나는 이것을 한번 맛본 이후 튀르키예 여행 하는 내내 미디예만 보이면 미친 듯이 달려가 한그 릇씩 뚝딱했다.
허기를 때우고 나서 우리는 전망이 좋은 Hobo라고하는 2층 커피숍으로 가서 창가 쪽에 자리 잡았다. 맥주와 와인을 한잔 마시면서 큰 통유리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감상했다. 커피숍 바로 밑에선 페리에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있었고 오르타쾨이 모스크가 길 위쪽에 우뚝 서 있었으며 그 넘어로 하얗고 큰 보스포루스 대교가 유럽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이어주고 있었다. 바깥에는 갈매기들과 비둘기들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고 때때로 확성기를 통해 이슬람 기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팀이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 커피숍에서 신청곡을 무지하게 써서 냈는데 나중엔 아예 우리가 음악을 정해서 트는 수준으로 음악을 신청했다. 신성한 이슬람 기도 소리와 함께 듣는 자본주의의 음악 팝을 함께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내가 그랜드바자르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다시 길을 나섰다.
길거리엔 축제일답게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팀이 말하길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버스를 타고 가면 너희들 사람들 사이에 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우린 택시를 탔다. 택시를 잡는 것도 거의 새벽 3시 토요일 이태원에서 택시 잡기 수준으로 힘들었다. 사람들 많은 곳을 피해 조금 걸어가는데 운이 좋게도 우리 앞에서 누군가 내리시길래 얼른 그 택시를 잡아탔다.
도시는 전체가 카오스였다. 사람들은 횡단보도 신호가 빨간불인데 무더기로 건너 다녔고 택시는 그런 사람들에게 경적을 울리며 욕을 했다. 운전사는 손님을 태우고 가는 내내 담배를 뻑뻑 피워댔고 심지어 담배를 사러 슈퍼에 들리기까지 했다. 택시 기사는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담배를 금방 사 올께요.”
팀은 그분께 담배를 기꺼이 사라고 웃으며 보내주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이스탄불 택시 운전사들은 하루에 12시간에서 14시간씩 일하는데 돈은 얼마 벌지 못해. 가족들을 위해 이렇게 일해야만 하니 아마 담배가 없으면 저분들은 삶을 견디기 너무 힘들 거야. 조금만 참아죠.”
나는 기사님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며 싫어하던 담배 냄새를 꾹 참고 그냥 말없이 창문을 내렸다. 담배를 사 들고 온 택시 기사님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빨간불에 무단횡단하면서 길을 건너던 사람들이 마치 택시 잘못이라는 듯이 택시를 세우고 욕을 하며 기사님께 삿대질을 해댔다. 택시는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도 회전하거나 곡선의 길에서도 속도 줄임 전혀 없이 카레이서가 경기장을 운전하듯이 달렸다. 롤러코스터 탄 것보다 더 아찔했다. 안전밸트를 했지만, 택시 창문 위에 손잡이를 꼭 잡아야만 했고 택시에서 내릴 때 팔에 쥐가 날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무질서 한 때가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던것 같은데 이곳은 그야말로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가까스로 그랜드 바자르에 왔지만, 불행히도 라마단 휴일이라 모든 가게가 문이 닫혀 있었다. 이런, 확인도 안 해보고 무작정 가자고 한 내 잘못이다. 팀은 본인이 확인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며 우린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나라도 매우 무질서 했다. 횡단보도 신호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어도 아무 죄책감 없이 길을 건넜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한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시민들의 의식이 많이 개선되었고 교통질서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방영했던 MBC 일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중 ‘이경규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이다. 대한민국의 교통사고율을 줄이기 위해 ‘정지선 지키기’라는 공익성 짙은 코너를 운영했고 정지선을 잘 지키는 시민에게 ‘양심 냉장고’를 선물해 주었다. 어느 날 한밤중 아무도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그때, 신호와 정지선을 모두 지키는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바로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이 장면에 많은 국민들은 감동하였고 그 방송 이후 신호와 정지선을 지키는 시민들이 늘어나면서 지금도 회자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너무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우리도 과도기를 겪었다. 그래서 마흔이라는 나이는 긴 역사로 봤을 때 한 찰나에 불과하지만, 나는 비교적 많은 역사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 덕분에 세상에 살아가는 많은 삶을 보며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지’라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택시 운전기사를 보며 경제적 부흥과 IMF를 겪은 아버지가 많이 생각났다. 지금 터키의 통화가치는 거의 휴지 조각이 되어가고 있다. 2021년 1월까지만 해도 1,000원에 150리라 가까이했었는데 우리가 여행하는 2022년 5월쯤엔 70리라 정도였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지금, 이 시점에는 22리라이다. 터키인이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방송인 알파고 시나씨씨는 터키의 의사 월급으로 삼성 최신 핸드폰을 구입할 수 없다고 했다. 터키에서 만난 사람들 말로는 지식인들은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회의를 느끼며 나라를 빠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혼란의 도시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실이 참 안쓰럽고 튀르키예 국민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도 그런 적이 있었다고. 힘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