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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07. 2023

새로운 사람들과 맞이한 새해


윌과 2021년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낼지 이야기하다가 ‘숙소와 가까운 하케셔마켓 주변을 무작정 걷다가 괜찮아 보이는 바에 들어가자!’라고 결정했다. 코로나19로 클럽들은 거의 모두 문을 닫았고 몇몇 바들은 오픈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베를린의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새해를 맞이하는지 궁금해서 이날은 숙소에서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숙소를 나서서 거리를 걷는데 생각보다 밤거리가 조용했다. 어디 괜찮은 분위기 바 없나? 요리조리 둘러보다 Yosoy Tapas Berlin이라는 타파스 바에서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모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가게로 들어서니 ‘ㄱ’ 형태로 커다란 바가 놓여 있고 한 열대여섯 명 정도가 옹기종기 바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좁은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테이블이 쭉 이어져 있었는데 바가 있는 쪽보다 많이 어두웠다. 

우리가 갔을 때 안쪽에 있는 테이블 딱 한 자리만 있어서 우선 그쪽에 앉아서 술과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그 자리는 너무 어두워서 데이트하면 좋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겨우 바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을 뿐인데 밝은 바깥 세계와 동떨어진 고립된 지하실에 감금이라도 되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몹시 답답했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데이트가 아니라 ‘파티’였으므로 웨이터에게 바 쪽에 자리가 나면 꼭 우리에게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한두 시간 정도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날이 날인지라 연말에 누가 좋은 자리를 내어줄까 조바심을 내고 있을 때, 마침 웨이터가 바 쪽에 자리가 났다고 옮기라고 알려주었다. 

Yes! 우리는 신나서 자리를 옮기고 진토닉을 주문했다. 


우리 자리는 기역으로 꺾여있던 바의 모퉁이 자리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코너에서 마주 보게 된 독일 커플과 눈이 자주 마주쳤고 어색하게 웃음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이야기하게 되었다. 올리버와 조지나는 데이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호감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수줍게 웃으며 대화하였고 보는 나까지 설레게 했다. 둘 다 기계공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같은 회사에서 만난 동료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로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우리는 독일의 정치, 역사, 통일 등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마침 독일의 선거철이라 올리버가 독일 선거에 관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올리버 말로는 유럽은 녹색당을 많이 투표하는데 올해 선거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유민주당으로 많이 투표했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미래를 봤다며 몹시 흐뭇해했다. 이어서 멀리서 온 우리 커플에게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베를린 관광 어땠어? 얼마나 있었어? 어디 가봤어? 한국은 요즘 어때? 북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베를린 곳곳에 전시된 전쟁의 흔적들을 보고 전쟁 폐허를 극복하고 눈부신 성장을 이룬 독일 사람들이 얼마나 멋진지 깨닫게 된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분단국가에서 온 대한민국 사람과 통일을 이미 한 독일 사람이 만났으니 주제는 자연스럽게 통일로 넘어갔다. 올리버는 통일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원래 우리는 통일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어. 이미 분위기가 동독이 좀 자유로워지고 있긴 했는데 결정적으로 통일이 된 이유는 한 정치인의 말실수로 생긴 일이야. 생방송 중에 기자가 어떤 정치인에게 '그럼 우린 언제부터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죠?'라고 물어봤는데, 그 정치인이 '지금부터요!'라고 말을 했지 뭐야? 그래서 그 텔레비전을 보던 수많은 사람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어. 난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이나. 당황한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해서 갑자기 통일을 선포해 버렸어.”


올리버는 서독 출신이고, 조지나는 어머니께서 동독 출신이었다. 이어서 올리버는 통일하고 나서 나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설명해 주었다.

“상상이 가니? 갑자기 통일이 되어버렸으니 동독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모든 삶이 공산당에 익숙해져 있었을 텐데 한순간의 삶의 방식이 바뀐 거야."

조지나가 말했다.

“맞아 우리 어머니가 몹시 힘들어하셨어. 특히 생활에 있어 모든 부분에 적응하기 어려워하셨어."

조지나 어머니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만 봐도 북한에서 목숨 걸고 건너오신 분들도 남한에서 적응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올리버가 말했다.

“한국은 이렇게 독일처럼 갑자기 통일하지 말고 부디 천천히 점진적으로 통일이 되길 바라.”

그리고 한번 생각해 보았다. 지금 대한민국에 통일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시간은 점점 2022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바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갑자기 모두 바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 춤추면서 분위기를 띄워줬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은 바가 순식간에 클럽으로 바뀌었다.

 1996년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베이사이드 보이스 리믹스 버전인 ‘마카레나’가 흘러나왔다. 이어서 모든 사람이 따라 부르기 쉬운 ‘YMCA’가 나왔고 다음에 ‘강남스타일’이 울려 퍼졌다. 아이고, 대한민국 마~이 컸다! 사람들은 그저 신나서 “오빤 강남스타일!” 부분을 외치며 실룩샐룩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리고 대망의 2022년이 밝았다. 바에 있는 사람들 모두 하나가 되어 카운트다운을 함께 외쳤다.


“3 ,2 ,1! Happy New Years!!!”


 바에 올라갔던 직원들이 하나 둘 내려왔을 때 한껏 신난 나는 “나도 바에 올라가도 돼?”라고 물어봤고 직원 한 명이 "물론이지!"라며 내 손을 잡아줬다. 

40대가 되면 춤추고 싶은  욕망이 사그라들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르게 이놈의 흥은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바 위로 올라가자 그곳에 있던 여성들이 너도 나도 이곳으로 올라왔다. 모두 흥겹게 춤을 추며 이곳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올리버와 조지나가 우리에게 질문했다.

“오늘 이곳에서 놀고 나서 다음에 가는 곳이 있어?”

우리가 없다고 하자 올리버가 말했다.

“우리 좀만 더 있다 자리를 옮길 건데 그곳은 예약을 해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야. 혹시 너희들 우리가 가는 곳에 같이 갈래? 내가 너희가 갈 수 있는지 알아봐 줄게.”

‘오 마이갓, 당연히 가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같이 가보고 싶어.”

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올리버가 핸드폰 스크린을 여기저기 바쁘게 만지며 어디론가 전화하더니 

“OK, 됐어. 입장료는 거기 가서 내.”

라고 했다.

 

새벽 한 시쯤 되었을까? 우리는 타파스 바를 나와 아름다운 슈프레강을 따라 어딘지 모를 그곳으로 올리버와 조지나를 따라 걸었다. 새벽인데도 강가를 따라 많은 사람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고 그들은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우리는 이윽고 어느 커다란 다리 밑에 도착했다. 여긴 주소도 없고 간판도 없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다리 밑에 문 하나만 덜렁 있었다.


올리버는 여기가 입구라고 했다

“헐......”

무슨 영화에서만 보던 은밀한 비밀클럽에 가는 것 같았다. 마치 비밀클럽 문이 ‘여긴 멤버십 회원들이나 아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 모르면 뭐...... 오지 마.’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올리버가 노크하자 덩치가 큰 남자 한 분이 나왔다. 올리버는 우리를 가리키며 독일어로 뭐라고 솰라솰라 설명해 주었다. 비밀클럽 입장료는 일 인당 35유로였다. 빠듯한 예산에 이렇게 돈을 쓸 생각이 없었는데 거의 둘이 한화 십만 원을 주고 들어가게 되었다. 입장료가 우리에게 비싸다는 걸 눈치챘는지 클럽에 들어가서 술은 올리버가 사 주었다. ‘올리버 고마워!’

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도무지 이 다리 밑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고급스러운 바가 펼쳐졌다. 코트를 맡기고 나서 우리는 모두 바 쪽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가 있었고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싶어서 내부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종업원이 나에게 오더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경고했다. 

올리버가 베를린에서 프라이빗 클럽에 오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건, 거기에서 있었던 일은 거기에 남겨둔다.’라는 원칙이 있다고 한다. 

예의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는데, 조지나는 우리 넷이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녀는 본인 핸드폰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우리 넷이 셀카를 찍어보려고 시도했는데 그 순간 종업원에게 또 딱 걸렸다. 

직사각형 형태의 길쭉한 내부를 따라 한쪽에는 우리가 앉은 바가 자리 잡고 있었고 건너편 쪽으로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세련된 두 커플이 우리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저지당한 우리 넷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그들 중 한 명이 웨이터 사라지자마자 조지나에게 다가와 “내가 사진 찍어줄게요.”라고 하며, 우리 넷의 사진을 찍어주셨다. 그녀의 일행은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아주 여유 있어 보였고 그들 모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련미가 철철 흘러넘쳤다. 대화를 해 보니 그들은 네덜란드에서 왔고 코로나 19 방역 규칙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놀 수가 없어서 새해를 즐기러 베를린에 왔다고 하셨다. 네 분 다 70대였고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젊어 보였다. 사진을 찍어주신 분은 깨끗한 백발 단발머리에 굵게 웨이브 한 머리,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우아하게 앉아서 시종일관 자상한 엄마 미소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와, 멋지다. 나도 나중에 70살이 되면 저렇게 늙고 싶다.’


우연한 만남으로 이뤄진, 돈을 줘도 못하는 이 신기한 경험이 나는 마냥 좋았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한 편 써봐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해 보았다.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여행하기 참 편하다. 숙소에서 핸드폰으로 간단히 검색하면 인터넷이 뭘 봐야 하는지 다 알려준다. ‘베를린에서 꼭 봐야 할 곳, 베를린 맛집, 베를린에서 가장 트렌디한 커피숍, 베를린에서 사진 찍기 좋은 장소, 베를린의 역사…….’ 그리고 유튜브를 보며 여러 교수님 혹은 전문가들이 강의하는 독일 역사도 공부하고 여행 유튜버들이 말하는 여행 팁들도 빠짐없이 적어둔다. 


하지만 여행을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이야말로 그 땅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올리버, 조지나와 이야기하며 독일 사람들이 다 이들과 같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요즘 독일의 젊은 사람들이 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곳에 가서 노는지, 직장 생활이나 삶은 어떤지 이것저것 들으며 그곳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인터넷으로 뒤적거려 찾아낸 정보만으로 한 여행, 그리고 예쁜 사진만 찍고 지나가 버리는 여행은 씨 없는 아보카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자 몇 줄에서 그 땅에서 일어났던 일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 땅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 경험은 내가 공부했던 지식과 잘 버무려져 풍성한 ‘지혜’가 된다. 


 여행을 떠난다면 한 번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서 신나게 놀아보길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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