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세상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좋은 변명이되는 방패와 창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 능글맞지만 고집센 아빠가 영원히 팔팔할 줄 알았지
조용하고 말 없는 너, 학창시절 이후로 연락닿지 않을거라 단정지었었지
이런 내 삶이라는 빅데이터가 만들어낸, 첫인상에 대한 평가와 당연함에 속아 편견들에 둘러쌓여 살았다.
내가 쓴 안경이 붉은색인지 모르고, 그 사람을 붉다 판단하였지만, 사랑이란 말로 가둬놨던 편견의 렌즈가 버터처럼 녹아내리고 나니, 그제서야 그 사람이 노란 사람임을 깨닫는 기쁨 혹은 후회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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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때 다니던 영어학원 선생님은 굉장히 호탕하셨다. 아이들을 사랑의 매로 혼내기도 하셨지, 지금이야 논란이 되어 진작 문을 닫았겠지만 그 당시에도 종종 50cm자로 자녀가 손바닥을 맞는 일은 흔치 않았다. 나는 선생님이 아이들이 말을 안듣고, 숙제를 안해와서 처벌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많았지만, 따르기는 또 얼마나 잘 따랐는지 모른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 그 학원에 다녔는데, 선생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다정히 내 이름을 부르시며 해주셨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모두 그릇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크기가 모두 달라. 너는 남들보다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 작게 태어났어. 그러니까 더 많이 담고 넘치게해서 그릇을 자꾸 자꾸 키워줘야해" 나를 약 5년간 지켜보면서 남들과는 생각하는 것도, 느끼고 이해하는것도 남다르다는 것을 아시고 하셨던 말씀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선생님이자, 좋은 지도자였다. 고등학교 들어가, 반전이 일어난 적이 있었기에 그 판단이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난 그걸 사랑스러운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좋은 모습이라 착각하는 그런 것 말고, 사랑으로 바라봐주고 진심으로 위해주는게 편견에서 나온것이라면 그건 정말 사랑스러운 편견일거다.
성인이 되고, 선생님에 대한 편견이 깨진 가장 훌륭하고 다정한 기억이었다. 13살 쯤, 잠깐 다녔던 수학학원 선생님과 친하셨었는데, 수학선생님이 말씀하셨을지도 모르지. 얘는 수학공식에 대한 이해와 납득을 못하면 응용도 사용도 못하는 아이라고 말이다. 수학이라는 학문은 세계가 약속한 사용법'공식'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이해하는 과정인데, 나는 그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고 납득하지 못하여서 진짜 지능장애가 있나 싶을 정도였을 것이다. 내게 수학은 완전 불가항력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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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은 늘 시험마다 수학에서 23점, 3점, 7점을 받는 내가 무척 공부를 못하셨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도 늘 답안지에 '선생님 사랑해요', '다음에는 더 열심히 풀게요' 라고 적었다고 안이뻐하기가 힘들다며, 공부좀 열심히 해주라고 하셨지, 그런 내가 생명과학과 한국사는 전교에서 1~2등을 다투다보니, 질문하기 위해 교무실로 내려갔을때 서로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수학선생님과 생명과학 선생님의 상반된 반응에 민망하면서도 웃겨죽는 줄 알았다.
수학선생님은 내가 질문도 할 줄 아냐면서, 세상에 무슨일이냐며 놀라셨고, 생명과학 선생님은 "얘 공부 잘하는 얘 아니에요?" 라고 하셨다. 당연하지, 생명과학은 체육선생님이 공부하라고 자습으로 수업을 바꿨을 때, 나한테 둘러쌓여 특강을 듣고, 시험은 전교 1등이 나랑 답안지 비교하러 올 수준이였으니까. 수학은 1개 맞으면서, 생명과학은 끽 해야 1개 틀리니까 그럴만도 했지, 진짜 웃긴 에피소드이다. 어쩔 수 없다. 수행평가는 망했을지 모른지언정 결단코 시험만큼은 수업에서 바로 이해하고 바로 머리에 들어가서 암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만큼 잘했던 과목들이니까.
그 시기엔 공부를 싫어한다는 스스로의 편견도 벗길 수 있었던 시기였다.
생명과학이라는 과목이 너무 재미있었고, 또 이해가 너무 잘 되어서 수업하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앞 단원을 이해하니, 다음 단원에 대한 이해는 더욱 쉽고 빠르게 와닿게 되니 선생님의 말씀이 수다떠는 것 마냥 집중이 잘 되는게 너무 좋았다. 그러니 수업에서 조는 일도 없었고, 다른애들은 이해한다고, 진도따라가기 바빠 놓치는 그 칠판에 꽉 찬 필기를 단 한번도 하나도 놓친적 없이 필기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필기량을 따라갔다는게 스스로 놀라울 지경이다. 지우는게 일일 정도로 필기를 많이 하셨던 선생님이셨기 때문.
"제발! 누구 이 부분 필기한 사람" 하고 우리반 1등이자 전교 1등이 찾아다녔을 때, 유일하게 대답한 사람은 나 뿐이였다. 걔는 내 책을 보더니 감탄하면서 조심스럽게 생명과학 교과서를 통째로 가져가서 좀 배껴도 되겠냐고 했다. 흔쾌하게 그러라고 했다. 그렇게 여러명이 달라붙어 내 필기를 배껴갔다. 인정받는 기분이고, 재미있게 공부한 과목이라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시험 등수나 점수에 운운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한국사랑 생명과학 제외하면 잼병이라 순위권 다툼같은건 안중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순수하게 그 과목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래서 공부하는게 즐겁고 이런 기분으로 평생 공부하면 축복같겠다고 생각했다.
공부 싫어하는 아이라는 편견,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편견, 공부 못한다는 친구라는 편견, 난 안된다는 스스로에 대한 편견이 모두 깨진 사건이였다. 스스로의 편견 외에 싫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깨질 수 있다는 걸 제대로 학습했다. 늘 200명 중에 꼴지일랑 말랑 다투던 내가, 절반 이상 등수가 상승했던 유일한 시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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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학창시절 대부분의 선생님은 "사랑스럽고 말 잘듣는 우리 모범생, 유일하게 공부만 안하지, 잘 안해도 되니까 공부만 좀 더 해보자" 라는 비슷한 말씀들로 날 무척 좋아해주셨다. 날 되게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로 아셨다. 밝은 성격과 매일 환하게 웃으면서 큰소리로 인사하고, 큰 강아지처럼 뛰어 달려가 선생님을 반기는 아이였던 것 같다.
근데 어릴 적 부터 맞벌이 부모님으로 인해 밤새 혼자 집을 지키는 일이 익숙했고, 시골이라 어울릴 친구도 학원도 많거나 적당치 않았었다. 게다가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아질 때 쯤, 어른들 싸움에 상처받아 늘 방구석에 콩벌래처럼 쭈구려 울며 자던 아픈 사춘기를 보내서, 심신이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 대학교 1학년 때는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세상을 등지겠다 맘먹고 보니 마땅히 목메달게 샤워줄밖에 안보여서 죽는것도 쉽지가 않다며 그냥 방에 다시 들어갔을 만큼 상태가 안좋았다. 모두가 날 사랑많이 받고 자란 밝은 성격이라 단정짓지만, 제대로 포옹받고 위로받지 못한 사춘기를 보내버린 탓에 만성적인 신경쇠약에 꾸준히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나를 사랑스럽게 봐주는 편견덕에, 그 편견이 주문이 되어 날 정말 그런 사람처럼 만들어 준다. 재밌고 성격좋고, 밝고 쾌활하거나 그런 것 말이다. 진짜 내가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게 가면일지 몰라도, 주문처럼 그런 말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그들은 날 정말 좋아하고, 예뻐해서 나로 인해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에서 태어난 말을 내게 선물하는 것이니까. 비꼬는 말 말고, 정말 날 좋아해서 해주는 말. 이보다 사랑스러운 편견이 있을까. 마치 마법주문 같다.
나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밝은 감정을 선물받아 내게 되돌려주는 저 사랑스러운 편견은 마법같다. 그런 마법같은 편견에 힘을 내보는 9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