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생각

by 베토디

랜덤 재생으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취향이 확고한 건지 참을성이 없는 건지 전주가 마음에 안 들면 손으로 에어팟을 따다 눌러 바로 다음곡으로 보내버린다. 앞부분만 듣고 다섯 곡 정도를 내리 스킵하는 일도 흔하다.


내가 유일하게 음악을 다음곡으로 보낼 수 없을 때는 고무장갑을 끼고 있을 때다.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할 때 물에 젖은 손으로 에어팟을 만질 수가 없어 싫으나 좋으나 음악을 계속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음악을 재생하기 전 부디 내 취향에 쏙 드는 곡이 나오길 기도한다. 그럼 랜덤 재생이 아니라 그냥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곡을 재생하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랜덤으로 재생되는 곡이 주는 설렘이 있다. 야, 이 노래가 나온다고? 어, 이 노래 뭐지? 같은 설렘.


오늘은 장장 한 시간에 걸쳐 화장실 청소를 했는데, 전주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가 나왔다. 고무장갑이 없는 나였으면 당장 따다를 눌렀을 곡이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 노래의 중반부에 가서는 '어, 좀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반부에 가서는 급기야 처음 듣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청소를 끝낸 후에 그 노래가 뭐였는지 찾아봤다. 존박의 <네 생각>이라는 곡이었다. 그래,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 노래를 다시 한번 재생해서 듣고 좋아요를 눌렀다.


고무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었으면 이 곡은 내 재생 목록을 스쳐 지나갔겠지. 문득 이렇게 내가 놓친 곡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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