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는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두 세계가 만나는 자리에서 탄생한 하나의 조화이자, 긴 여정의 흔적입니다. 한국어는 한자의 틀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편함과 어색함 속에서도, 이두는 한국어가 진정한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며 다른 것들 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나 자신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를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발견합니다. 나를 다른 것에 기대어 다시 바라보는 순간, 나는 이전보다 더 나아간 ‘나’가 됩니다.
이두는 바로 그러한 삶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어는 한자의 형태를 빌리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타자의 틀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불편하고 어색했던 이두의 경험은 결국 한글이라는 완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자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틀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한 결과였습니다.
나 또한 이두와 같은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내가 한국에서 살아가며 이곳의 언어와 문화, 규칙을 따를 때, 그것은 나를 잃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는 타자를 통해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이전보다 더 나다워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관습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확장하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이두는 우리에게 ‘타자를 통해 나를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타인의 틀 속에서 우리는 때로 불완전함과 맞닥뜨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내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한국어가 한자를 빌려 자신을 표현하며 성장했듯, 우리는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며 우리 자신을 더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불완전함은 완성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며, 타자와의 만남은 나를 더욱 깊이 완성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이두는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하며, 더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는지를 알려주는 철학입니다. 나의 경계를 넘어 타자를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나를 확장하고, 내가 아닌 것들을 통해 나를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 이두는 바로 그 길 위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