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입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처럼 깜박이며 위험을 경고해 주고,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가끔 높은 벽을 세우며 우리를 가두기도 합니다. 그 벽 안에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살아가는 기쁨은 잃어버리곤 합니다.
삶의 모든 선택은 두려움과 마주합니다. 일이든, 사랑이든, 꿈이든, 두려움은 속삭입니다. “위험을 피하라, 상처받지 마라.” 하지만 사랑은 정반대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은 벽 밖으로 나아가라고 요구하며, 안전을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열어야 비로소 시작됩니다.
사랑은 취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랑은 나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드러냄 속에서 존재하는 불완전함마저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나를 맡기고, 상처받을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이러한 두려움을 넘어설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사랑은 강물처럼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흐르고 부딪히며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어둡고 단단했던 세상은 사랑을 통해 부드럽고 밝게 물들며,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전에 몰랐던 나를 발견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거울처럼 우리의 본모습을 비춰주며, 내가 될 수 있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무게는 그 아름다움에서 나옵니다.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걸겠다는 결심입니다. 죽음이 찾아올 때,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남긴 자리는 그 자체로 고통입니다. 상실은 우리의 일부를 떼어내는 듯한 고통을 남기지만, 그것은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깊이 새겨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슬픔은 사랑의 부재가 아닙니다. 슬픔은 사랑의 증거이며, 사랑이 남긴 흔적입니다. 깊이 사랑했기에 슬픔도 깊습니다. 이 고통은 때로 우리를 짓누르지만,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왔음을 증명하는 무게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말합니다. “사랑하지 마라. 상처받지 마라.” 하지만 두려움에 의지한 삶은 생존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과 기쁨이 가져다줄 깊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통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나눈 사랑의 깊이를 증명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제 누군가 제게 “살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잃을 것을 다 잃은 지금, 삶은 무엇을 의미할까?”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Au milieu de l’hiver, j’apprenais enfin qu’il y avait en moi un été invincible.
(한겨울 속에서 나는 마침내 내 안에 꺼지지 않는 여름이 있음을 깨달았다.)
저는 지금 혹독한 겨울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저를 변화시켰고, 상실 속에서도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잃은 것들은 여전히 저를 통해 존재하며, 제가 걸어갈 길을 비춥니다.
삶의 모든 것을—사랑, 슬픔, 고통을—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상실을 넘어 나아가는 삶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뿌리를 내리며 하늘로 뻗어 나가는 나무처럼 성장합니다. 고통을 피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사랑과 기쁨의 깊이를 받아들이는 삶이야말로 참된 삶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