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와 종이의 대화

by 현진

만년필로 글을 쓰는 일은 조용하고도 깊은 기쁨이다. 종이가 펜촉을 받아들이는 미묘한 떨림, 잉크가 선을 따라 흐르며 마음의 흔적을 남기는 순간. 서두를 수도, 무심히 흘려 보낼 수도 없는 이 시간은 나를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머물게 한다.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 펜은 나를 다독인다. 한 획, 한 단어가 숨이 되고 발걸음이 되어 혼돈을 정리한다. 펜촉은 미끄러지고, 잉크는 잔잔히 흐르며, 종이는 그 모든 것을 담는다. 이 과정은 글쓰기라기보다 명상에 가깝다.


그러나 이 고요함이 처음부터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처음 만년필을 손에 쥐었을 때, 잉크는 마구 번져 선이 무너지고, 가장자리는 얼음이 스는 것처럼 퍼졌다. 머릿속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 종이 위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혼란으로 변했다. ‘문제는 펜일까? 종이일까? 아니면 나 자신일까?’ 되묻게 되었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다. 잉크의 무게와 흐름을 익히고, 펜촉의 섬세함과 종이의 특성을 알게 되었다. 어떤 펜은 유연하고, 어떤 잉크는 무겁고, 어떤 종이는 그 모두를 완벽히 품는다. 글쓰기란 나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잉크와 종이와의 대화였다.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생각은 잉크와 같다는 것을. 그것은 머릿속에서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다. 세상과 닿아야만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그러나 모든 표면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이는 잉크를 밀어내고, 어떤 종이는 잉크를 마구 흡수해 흐트러뜨린다. 하지만 그마저도 배움이 된다.


잘못된 종이는 잉크의 한계를 가르쳐준다. 선이 무너지는 순간, 펜의 방향을 다듬고, 더 나은 표면을 찾게 한다. 실패는 생각을 정리하게 하고, 결국 더 선명한 목소리를 만들어준다. 때로는 내가 변해야 하고, 때로는 종이가 변해야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펜과 같다. 시간이 지나며 다듬어지고, 경험으로 인해 단단해진다. 생각은 잉크다. 세상과 만나야 그 빛을 드러낸다. 그리고 세상은 종이다. 다양한 표면을 가진 세상은 때로는 우리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때로는 거부한다.


펜, 잉크, 그리고 종이가 만나는 순간은 하나의 창조다. 그것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 흔적은 그 순간의 무게를 담고 있다.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미완성이지만, 그것은 세 가지가 만나 만들어낸 대화의 결과다.


지금도 펜을 쥐고 글을 쓰며 그 조화를 느낀다. 펜촉은 천천히 흐르고, 잉크는 종이에 스며든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머문다.


이 과정은 나에게 통제가 아니라 놓아버림을 가르친다. 완벽함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잉크는 흐르고,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 그것은 살아 있다.


결국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일 것이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표면을 찾으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잉크처럼 남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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