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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Jun 24. 2021

엄마와 손톱

선후관계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꽤나 많은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자연스레 없어진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나며 생기게 된 것들도 있는데 손에 대한 컴플렉스는 아주 어릴 적부터 있어왔다.


 중고등학교에서 손톱 검사를 할 때면 친구들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손등을 올리고 있을 동안 나는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손가락을 오므려 검사를 받곤 했다. 짧고 굵은 손가락에 부채꼴로 퍼지는 손톱과 지나치게 건조한 손을 선생님께조차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왼쪽 엄지손톱은 유난히 못났다.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근 20년 전 가족사진의 액자를 맞추러 가던 날이었다. 자갈밭의 주차장에 들어서니 차가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렸다. 이내 시동이 꺼졌다. 잠에서 깬 내가 뒷 좌석에서 내리는데 엄마가 차 문을 닫아주었다. 그런데 그만 내 엄지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문 틈으로 끼어버린 것이다. 정말이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아픔이었다.


 처음엔 엄마도 너무 놀라 엉엉 우는 나를 다시 뒷 좌석에 태우고는 한참을 달래주었다. 엄지손톱에 심장이 뛰고 있는 듯 아픔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안해하던 엄마는 서서히 지친 표정을 짓더니 ‘그만해라’하며 정색했다. 황당했다.


 아니, 엄마가 그랬잖아..


 엄마의 엄포를 듣고도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은 조금도 엄살이 아니었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문득문득 이때의 엄마가 재밌는 거다. 그래서 이따금씩 이 이야기를 꺼내곤 하는데, 가족들이 다들 엄마한테 왜 애를 울려놓고 화를 냈냐 물으면 엄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웃는다. 역시 때린 사람은 모르고 맞은 사람만 기억하는 법이다.


 하여튼 보랏빛 피멍이 들어 불룩해진 손톱 밑에 고인 피를 빼려 병원을 찾았다. 집과 학교의 딱 중간에 위치한 한의원이었다. 초반 몇 번을 제외하고는 학교가 끝나면 늘 홀로 병원을 찾았다. 그 따가운 침을 맞을 때면, 나는 소리를 내는 대신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것으로 참아냈다. 그 후 휙- 하고 간호사 언니가 커튼을 쳐버리면, 배꼽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는 적외선을 쬐었다. 그렇게 눈을 말똥거리다 치료가 끝나면 씩씩하게 집으로 향했다.


  개월 간의 치료  덜렁거리는 손톱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허무하게 빠졌다. 매달리던 철봉 밑에 떨어진 건지, 뛰어놀던 구령대 근처에서 빠진 건지 다시 손톱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없었다.  밑으로 숨어있던  손톱은 원래의 것에  정도밖에 덮지 못한  내게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그 때부터 엄지의 가운데에는 가로 1센티 정도가 움푹 패여있었다. 20 중반이 넘어서  자국은 사라졌지만,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엄지를 감싼  주먹을 쥐고 다녔을 정도로 엄지손톱이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빠진 손톱에 관한 생생한 기억은 딱 여기까지다. 그런데 어렸을 적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이 일이 10년도 더 지난 최근에서야 내게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방 침은 물론이고, 헌혈이나 건강 검진을 할 때에도 주사 바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함은 혼자서도 침 치료를 잘 다녔던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걸 또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는 결혼 후 계속 가정주부로 살아왔는데 왜 그 꼬맹이가 커튼 뒤에서 배에 힘을 주어가며 침을 혼자 맞도록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다.


 "엄마, 엄만 그때 왜 한의원을 같이 안 다녀줬어?"

 "어머, 내가 그랬니?"


 그럼 그렇지. 엄마는 이번에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그때 왜 내 손을 잡고 병원에 가주지 않았냐는 원망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의 포근함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저 뜬금없이 그 기억을 되짚다 궁금했을 뿐이다.


 얼마 전 일찍 퇴근하고 엄마 무릎에 누워있는데 이 이야기가 다시 한번 나왔다. 엄마는 “미안해, 생각해보니 그때는 엄마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 때라 머리가 아파서 매일 누워있었잖니”라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당시 엄마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였다고 했다. 갑자기 스스로가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혼자서 병원 다니는 것을 무서워하고, 엄마 때문에 이 지경이 됐는데 병원에 같이 가주지도 않느냐며 떼를 썼다면 엄마가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가늠해보았기 때문이다.


 열한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용감하고 독립심이 있어 혼자서도 씩씩했는지, 그런 경험 덕분에 용감함과 독립심이 움튼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다. 그 많은 경험과 기억들이 지금의 나와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보면 예상치도 못했던 것이 참 많다는 것이다. 늦게나마 인지하고 넘어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는 선후관계도 파악하지 못하고, 혹은 파악하려 하지도 않고 우리 안의 것을 지나칠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더 많은 경험과 생각에 목마른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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