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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규리 May 20. 2021

이석원

<2인조>

 독서에 큰 감흥이 없던 내가 책을 가까이한 것은 불과 5년 전쯤의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읽는 소설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일 년에 한 권 읽을까 말까 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재수를 하던 스무 살, ‘강남 붕어빵’이라고 불리던 디저트 가게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잠깐을 읽다 덮었을 뿐인데 <보통의 존재>라는 제목이 자꾸 아른거렸다. 결국 며칠 뒤 구입까지 하였다. 구체적으로 기억나진 않지만 이혼의 아픔이 있으며 건강에 이상이 생긴 한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현실적인 시선이 어린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은은하지만 확실했다고나 할까. 그 후 읽은 책 역시 손에 꼽을 정도이니 20대 초반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당연히 <보통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5년쯤 지났을까. 교보문고 매대에서 우연히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발견했고, '그 이석원?' 하면서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토요일 낮이면 창문을 연 후 벽에 발을 올리고 누워 책을 읽곤 했는데, 햇빛이 비춰 더 하얗게 반짝이는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으 소리가 날 정도로 마냥 행복했다. 말 그대로 마냥 행복했다.

 

 그때부터 작가의 사생활을 엿보았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활발히 운영 중인 그의 블로그를 구독하고, 노래 자체의 음악성보다는 이 사람이 불렀다는 사실에 끌려 몇 시간 동안 언니네 이발관의 ‘혼자 추는 춤’만 듣기도 했다. 한 번은 그가 자주 찾는 찻집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 ‘오후의 홍차’라는 곳을 가려고 했는데, 찾아보니 그런 찻집은 그의 책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고 해 실망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이후로도 출간된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실내인간> 등을 읽으면서 내 방 책장에 작은 이석원 코너를 마련해 나갔다. 막연했던 나의 책 읽기에 취향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가의 공백기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등 몇 권을 더 접하며 20대 중반이 지났다. 다시 서점에 발걸음이 뜸해질 무렵,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 복지로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제공하는데 본인은 읽고 싶은 것이 없으니 나에게 선물하겠다는 것이다. 무슨 책이 좋을까 살피는데 이석원의 신간이 나왔다고 했다. 제목을 보고는 <실내인간> 같은 소설인가?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었던 터라 망설이며 소개를 보니 산문이라고 했다(소설이었어도 구매를 했겠지만). 망설임 없이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우리는 누구나 날 때부터 2인조다.’ 이번에도 관계에 대한 책이구나 하며 읽기를 미루다 몇 주가 흘렀다. 오랜만에 방청소를 하는데 이석원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하루에 딱 열 페이지만 읽자’ 하고 책을 펼쳤다. 그렇게 이틀 만에 120 페이지를 넘겼다. 참 흡입력이 좋은 작가다. 

 

 필자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써의 2인조를 말하고 있었지만, 읽을수록 나와 작가가 조를 이룬 것 마냥 느껴졌다. 실로 이석원은 그랬다. 책 속에 나온 그의 고민이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꼭 닮아서 나와 이토록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오십을 넘긴 작가와 내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난 이제 막 서른인데 말이지.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여러 방면에서 여러 고민에 빠지는 서른의 기로에서, 타인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체감한다. 최근 가장 고민인 진로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 직업적 특성을 잘 알고 있는 회사 선배는 중요시하는 가치가 나와 다른 경우가 많아 진정한 조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 어느 정도 추구하는 인생이 비슷한 사람의 조언은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민의 범위나 깊이, 가치관이 어떤지도 모른 채 ‘넌 배가 불렀어’라며 마구잡이 식의 조언을 해주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러다 보면 결국 나는 어떤 조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자책하며 무기력의 늪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나 이 책은 내가 구태여 묻지 않아도 답을 준다. 행복을 추구하지만, 적당한 만족을 위해서는 적당히 물질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 또 어떤 과정으로 이런 고민이 생겼는지, 고민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더라도 어떤 마음가짐을 품는 것이 중요한지 말해준다. 그것도 모든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단정 짓지 않으면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작가의 조언을 들으며, 결국 용기의 부족이라는 걸 깨달았다. 조언은 말 그대로 도움이 되는 말일뿐, 선택지 중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떤 마음을 선택할지는 나에게 달렸다. 선택을 내릴 용기가 하루아침에 충전되진 않겠지만, 모호했던 생각들이 정리되어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닮은 생각을 가지고도 잘 살아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또 운 좋게도 글을 잘 써주어 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하다. 언젠가 인문학을 읽어야 진정한 독서라던 친구가 생각난다. 글쎄, 많은 지식은 확실히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가 책을 통해 갖추고 싶은 것은 생존을 위한 경쟁력 같은 것이 아니다. 긴 하루 끝에 샤워를 마친 뒤, 틀어 놓은 온수매트 위에 몸을 뉘일 때의 따뜻함처럼 다시금 단단해질 수 있는 힘을 주는 글이 좋다. 

 

 이석원을 좋아한다는 고백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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