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앉아있을 뿐

생각하지 않는다.

by 무명

학창 시절에 난 공부를 잘했다. 그 당시 고등학교는 7시에는 등교해서 11시~12시에 하교하는 일상을 보냈고, 주말에도 나가서 저녁까지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3년을 내내 동일한 공부 했다.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공부가 재밌었던 거 같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긴 시간을 반복할 수는 없을 거다.

난 수학, 과학을 잘했다. 그게 재밌었으니까. 그 과목들은 공부를 꽤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 손으로 쓰면서 공부를 한다는 점도 그렇고, 문제 풀이 과정에서 논리를 생각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떠올리는 행위가 몸은 가만히 있지만, 꽤 능동적인 과정이었다. 공부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던 시기였기에, 그때엔 그렇게 긴 기간, 긴 시간 동안 앉아서 공부할 수 있던 게 아닐까.


사람은 계속 공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렇다. 다만, 지금은 공부하려 할 때는 그 능동성이, 적극성이 없다.

자리에 앉는다. 책을 펴고 글을 본다. 문제를 푼다. 활자를 읽지만 다만 생각이 없다. 글을 분명 읽고 있는 데도 어떤 생각을 하지 않고 읽고 있는 게 스스로 느껴진다. 공부를 하면서도 그냥 이 지식들을, 문제 풀이를 체화하려고 한다. 다만, 신기한 건 그렇게 많이 읽고 공부를 하면 그게 또 어느 정도 된다.

문제의 지문을 읽어보면 어색한 게 느껴진다. 그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그런 느낌이 생긴다. 그게 또 대게 맞는다.

영어 회화 공부도 하는데, 이것도 똑같이 접근한다. 그저 많이 말하고, 듣고, 읽는 걸로 영어가 익숙해지길 바라고 있다. 사실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문법에 맞는 문장 구조를 만들어야 하니까. 또한 어순이 반대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국어로 문장 전부 떠올리고 그걸 영작해서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일단 말하고 본다. 그래서 내 영어는 일단 I think 라던지, I was 라던지 먼가 주어, 동사를 일단 말하고 수정한다. 왜냐면 동사를 다시 말해야 한다. 때론 주어도 다시 말해야 한다.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냥 평서로 시작해서 다시 말하기도 한다.


공부를 수동적으로 하는 느낌이다. 일단 많은 시간을 들여보자.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그러다가 잘하게 되겠지. 뭔가 책임감 없이 공부한다. 그냥 하다 보면 되겠지.

분명 안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그렇게 공부를 한다. 정확한 시기는 언제일까. 학부 과정을 할 때 일까. 대학원생으로 연구를 하던 때부터 일까. 잘 모르겠다.

다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게 되고 아니, 하고 싶던 공부가 사실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단 걸 서서히 깨달으면서 그렇게 된 걸까. 아니면, 그간 각종 실패를 겪으며 내가 들여온 노력에 화답을 얻지 못할 수 있음을 알아버려서 그런 걸까.


문득 이런 나의 수동성이 느껴졌지만, 어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갤럭시 이어 버드 귀에 꽂고, 유튜브 뮤직 홈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노래를 눌렀다. 보통은 거리에서는 노이즈 캔슬링은 안키지만 이번엔 키고 들었다.

일단 튀어나왔지만 갈 곳이 없다. 목표가, 목적이, 가야 할 곳이 없다. 아파트 입구에 서서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고민해 봐도 알 수 없어서 그냥 길 따라가기로 했다. 그렇게 걷는 데, 문득 나의 걸음이 보였다. 다리가 먼저 앞으로 나가고 몸이 뒤따라온다. 주머니에는 지갑과 휴대전화가 들어있고 걸음엔 힘이 없다. 내 걸음걸이는 상당히 느릿하고 다리는 높이 들지 않는다. 팔은 그저 늘어져서 아주 약간 흔들릴 뿐이다. 손으로 무언가를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 걸어 다닐 때는 휴대전화도 보지 않는다.


그러자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유일하게 글을 쓸 때에만 생각하는 듯하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남길 때. 마구 생각한다. 쓰고 나면 다시 읽어 보고 수정도 한다. 문법은 맞는가. 문장은 괜찮은가. 불필요한 문장이 있지는 않은가.

근래에 하는 행위 중에 유일하게, 능동적으로 한다. 살아있는 느낌이다.

최근 백수린 작가의 '봄밤의 모든 것'이란 단편소설집을 다 읽었지만 리뷰를 길게 남기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다. 다만, 책을 다 읽고 나서 강하게 느낀 하나의 감정은 '허무함'이었다. 공허함. 허무함.

소설 속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이 허무함이지 않을까. 비어있는 삶의 구멍을 느끼었다. 그리고 그건, 소설 속의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만이 아니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인생은, 삶은 너무 공허하다. 꿈이 없다. 꿈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 명확하게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행동도 없다. 단순하게 지금 먹고 싶은 것도 없다. 유일하게 때때로 쓰고 싶은 글만 있을 뿐.


그대로 근처의 마트로 갔다. 그리고 그냥 뻥튀기 하나를 샀다. 입이 심심할 때 먹을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뻥튀기를 생각했었다. 한 봉지 사서 몇 개 집어먹으면서 술 한잔 해야겠다.

칼바도스를 온 더 락으로 마셔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눈물 흘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