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마주한 자의 예민
어느 날 내가 바퀴벌레로 변한다면 어떡할 거야?
한때, 이런 질문 하는 게 유행이었다. 원조는 소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독일어 사전에도 등재되어있다고 하는 ‘카프카적’이란 형용사가 바로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이름을 딴 단어이다. 카프카가 쓴 글들이 주는 강렬한 분위기와 설정이 특색있고 유명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정확히 독일어 사전에서는 어떻게 뜻을 정의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카프카적이다고 한다면 우리는 대체로 매우 불쾌하고, 혼란스럽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걸로 생각한다. 초현실적인, 비현실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난 생각한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어보면 그런 설정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돌연한 출발’이란 민음사에서 나온 카프카의 단편선을 읽었고, 그 안에 있는 여러 소설은 모두 그런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카프카의 가장 유명한 소설 ‘변신’은 시작부터 현실적이지 않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자신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있음을 깨닫는다. 소설은 그가 변한 이유라던가, 변한 방법 같은 건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이 펼쳐질 뿐이다. 그는 해충이 되어있었고 가족의 장남으로서, 돈을 벌어오기 위해 일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몸이 갑자기 해충이 되었으니, 움직이기가 불편하고 해충이 돼서 사람들과 대화도 통하지 않는다. 그저 가족들의 대화를 그레고르는 알아들을 수만 있다.
‘변신’의 이야기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장남이, 하루아침에 그 능력을 상실하는 걸 넘어서 가족의 짐이 되어버린 사태를 상정한다. 사실 어느 정도는 내용을 알고 읽었다. 너무 유명한 소설이라서, 줄거리뿐 아니라 이 소설을 해설하는 영상도 종종 봤다. 생계를 책임지던 한 인간이 완전히 그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하대받고 집안에서의 위치를 잃어버리는 이야기. 부모가 그를 대하는 태도와 유일하게 그를 챙겨주고 생각해주는 누이동생의 태도가 대비되는 소설.
이 소설은 한순간 무능력해지면서 인간이 가지는 책임감, 능력. 이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받게 될 대우와 자괴감. 그리고 그런 무능력해진 사람을 대하는 주변인의 어떤 매정함을 그려놓은 소설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결국 그 흉측한 해충이 죽었음을 확인하자, 가족들은 갑자기 기운을 되찾고 여행을 떠나면서 세상의 온기를 느끼고, 따뜻한 미래를 기대한다. 희망을 얻은 듯하다. 자신들의 삶에, 생계에 방해만 되던 존재가 사라진 것으로 행복을 얻은 듯한 모습이다. 그런 희망찬 미래를 그들이 일순간 느껴버리는 모습은 인간의 매정함을 새삼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 그레고르는 이미 잊혔다.
이런 전개는 능력을 갖추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와는 다르게, 어쩌면 나만의 독특한 감상을 더 남겨본다. 위에서의 감상은 순전히 그레고르의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소설이 그레고르의 시점을 위주로 그리기 때문에, 그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난 가족들은 어떤가 생각한다. 그들한테 있어서는, 한순간에 생계가 끊겨버린 상황이다. 거기에 추가로 흉측해서 마주하기도 싫은 이상한 괴물이 집안에 등장했다. 그 괴물이 그들의 집에 얹혀살면서 밥만 축내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가족에게는 상당한 시련과 고난이 발생했다. 흉측한 해충이 된 그레고르가 그 고난을 상징한다. 가족들은 고난을 마주하는 태도가 다르다.
먼저 누이동생은 고난을 직면한다. 방 안에 있는 해충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방 청소를 해주고 가구를 정리해주는 등 그 해충(고난)을 생각한다.
부모는 기본적으로 고난을 회피한다. 그레고르가 그렇게 된 이후로 그들은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마치 그레고르가 없는 존재인 것처럼 행동한다. 거기서 어머니인 잠자 부인은, 그런데도 한 번씩 직접 보길 원하기도 하고 누이동생을 돕기도 한다. 그러나, 직접 마주하면 놀라서 실신한다. 아버지는 잠자씨는 무시한다. 철저히 모르는 척한다.
고난을 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태도를 상징한다. 이야기가 절정에 다가가면, 누이동생이 목소리를 높인다. 저건 오빠가 아니라고 버려야 한다고 처리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살갑게 보살피던 누이동생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엔 따뜻하게 해충을 생각해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의무적으로 행동하던 동생은 결국은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것이다. 난 이게 고난을 직면한 사람의 반응이라 본다.
살면서 어떤 어려움에 닥친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고난에 맞서, 부딪히며 현재를 사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예민하고 때론 공격적인 언사를 보일 수도 있다. 다소 가벼운 예를 들어보자면, 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을 생각해보자. 학생은 3년간 개근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학원도 하나쯤은 다녔다. 수시는 넣어봤지만 다 떨어졌다. 그에겐 정시만이 남아있다. 완전 최상위권 학생은 아니지만, 스스로 상위권 학생은 된다고 여긴다. 10월쯤에 그 학생은 예민할 수 있다. 소음에 쉽게 분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학생에게 가서 갑자기 할머니 칠순 잔치 때 할 공연 준비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거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입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직접 마주하며 싸우고 있는 학생이기에, 여유가 없고 예민한 거다.
그에 비하면, 그레고르의 부모는 어떤가. 고난을 전혀 마주하지 않는다. 그러니, 예민하지 않다. 누이동생의 말에 수긍하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의견을 지니진 않는다. 그러니까, 누이동생처럼 분노가 터져 나온다거나 하는 등의 반응도 없다. 가끔 마주하면, 그때만 실신하거나 사과를 던져대거나 할 뿐이다. 그저 그 순간만 모면한다. 똑같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더라도, 대학교 되는 대로 가면 된다는 생각이거나, 안 갈 생각이라면. 즉, 입시를 포기했다면 고3이 10월에 예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편안하다. 장기자랑 준비도 할 수 있다. 여유가 있다. 아이러니 한 부분은,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없어진 건 아니다. 그저 무시하고 회피할 뿐이다. 그런데도 예민하지 않고 여유롭다. 딱, 그레고르 부모의 모습이다. 당연히 이는 문제가 있다. 결코 고난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거다.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거다. 오히려 어쩌면 더 큰 고난으로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고난으로. (결국 그레고르가 방 밖으로 나와서, 하숙생을 놀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어떤 고난이 우리에게 닥칠 때, 이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마주해야 하고, 그럴 때 성격이나 행동이 다소 거칠고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이 소설은 고난 자체인 그레고르가 주된 시점이기에, 누이동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 생각의 변화를, 그 분노를 우린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우리 주변에 누군가가 전에 없이 예민하거나 공격적이라면, 지금 그가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가는 중이구나 하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오랜만에 봤더니, 애가 싸가지가 없어졌네. 변했네. 하고 비난하기보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