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가족애는 어디서 생기는 걸까.

by 무명

엄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생 아이 토모가 있다. 토모의 어머니는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다. 술 마시고 밤늦게 들어오고 종종 말없이 집을 나가서는 한 달 씩 집에 들어오지 않고는 한다. 영화는 토모가 쓸쓸한 분위기의 집 안에서 혼자 삼각김밥을 먹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러곤 다음 날에 바로 엄마는 집을 나간다. 이후 토모는 늘상 있던 일인 양, 그대로 외삼촌을 찾아가고 외삼촌도 토모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여기서 외삼촌의 동거인, 애인인 린코를 만난다. 린코는 태어났을 땐 남자였지만 지금은 여자인 트랜스젠더다. 트랜스젠더인 린코와 외삼촌 그리고 엄마의 보살핌이 부족한 여자아이, 토모. 이렇게 셋이 같이 살면서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이다.

다만, 단순히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라고 정해버리기엔 그들이 정말로 가족이 되는지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마지막 결말에서 오는 현실성 때문에 씁쓸함, 슬픔 혹은 찜찜함의 감정이 남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 가족이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를 가진다. 이에 대해, 영화는 정답을 내리지 않는 게, 이 영화의 미덕이라 생각한다. 편견은 보여줄 뿐이고 개인의 고통을 드러낼 뿐이다. 영화는 그저 질문을 던진다. 가족이 무엇인가? 어떤 게 가족인가? 트랜스 젠더 여성도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가? 영화를 본 관객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라고 말이다.

영화를 보면 많은 관객이 린코의 감정에 몰입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린코가 가족을 만드는 걸 원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생각과 감정이 그릇된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은 결말을 보여주었고 개인적으로 영화의 결말에 공감한다.

처음으로 린코가 토모가 사랑스러워서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린코의 애인인 외삼촌(마키오)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긍정했다. 난 이때부터 결말을 예상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결국 린코는 상처받을 거라 보았다. 전부터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조건 없는 애정은 어디서부터 기원하는 건지 궁금했었다. 여전히 그 정답을 아는 건 아니지만, 다만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으면서 겪은 경험, 기억이 쌓여서 생긴 것이라 생각한다. 10개월이란 기간과 그 기간 동안 겪는 다양한 난관을 24시간 내내 같이 겪은 동지와도 같은 감정이 모성애가 되는 건 아닐까. 오랜 시간 애써가며 키워낸 존재에 대한 사랑.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이런 결론으론 이해할 수 없는 게 발생하는데, 그게 바로 입양이다. 종종 입양 부모가, 친부모보다도 더 큰 사랑을 베푸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자신이 낳지도 않은 그 생명체에게 부모로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자신이 입양할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아이를 낳아보지도, 키워보지도 않은 나이라서 아직은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린코가 입양을 말할 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몇 번 만나지도 않았고 며칠 같이 살지도 않은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이유로 입양하고 싶다는 그 말이, 내겐 다소 경솔하게도 느껴졌다.

사랑스럽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어선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부모가 가지는 사랑이란 조건이 없기에 위대하다. 언젠가 토모가 사랑스럽지 않아진다면 그땐 어떻게 할 건가. 어려운 문제다. 물론 난 여전히 입양하는 부모들의 생각을 모른다. 그 훌륭한 분들이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내 말이 그저 짧은 식견으로 인한 그릇된 오해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토모에겐 여전히 엄마가 있다. 그저 그 엄마가 가출해서 지금 옆에 없을 뿐이지, 조만간 돌아올 예정이다. 종종 가출했었다는 말은, 다시 돌아오긴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기에, 개인적으로 시간의 힘을 믿는 편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성애가 10개월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은 기억의 결과물이었듯이, 가족도 같이 살아온 긴 시간이 보증하는 특수한 관계 같은 게 아닐까. 아무리 빌어먹을 어머니라고 할지라도, 토모는 어머니와 11년을 살았다. 11년. 강산이 바뀔 이 긴 시간을 한 달의 시간만으로 대체하는 건 불가능하다. 린코가 도시락을 싸주고 같이 게임을 하고 쇼핑하러 다니며 생활하더라도, 그렇게 밀도 있게 보낸다고 할지라도 1달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마지막에 토모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게 이해된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받고자 했던 보살핌(린코가 해준 것들이다)을 말하면서도, 오늘은 같이 못 간다고 말하는 토모는 너무도 성숙한 아이였다.

현실적인 결론을 보여준 이 영화 결말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그게 현실이다. 토모는 여전히 어머니가 필요하다. 진짜 친엄마가. 그렇다고 해도, 외삼촌과의 관계가 끊어지진 않을 거고 여전히 린코와도 만날 거다.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가 좀 더 가정적인 사람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더 밖으로 싸돌아 다닐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중간에 린코와 토모 그리고 카이가 같이 노는 장면이 있다. 카이는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토모의 동급생이다. 토모가 트랜스젠더와 같이 산다는 게 목격되면서 카이의 어머니는 카이에게 같이 놀지 말라고 했지만, 그런데도 토모와 같이 놀고 싶어 했고 결국 린코까지도 같이 노는 장면이다. 약간 뜬금없지만, 문득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자기 앞의 생’은 세상에서 고립된 외로운 존재들이 모여서 서로 도움을 주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이 죄다 힘겹게 살아가며, 상처받은 인물들이다. 궁핍하고 비루하지만, 따뜻한 이야기였다. 린코, 토모, 카이는 트랜스 젠더, 버림받은 아이, 동성애자여서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고, 이들이 모여 행복하게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기 앞의 생’이 주는 따스함이 생각났다.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영화 속 마을이 주는 풍경과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보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이나 토모가 종종 서 있는 하천 위 다리, 소풍 간 공원 같은 장소들이 주는 풍경을 스크린으로 즐겨도 좋았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북 리뷰] 프란츠 카프카 -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