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인 줄 알았는데, 무너지는 이야기였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엔 과묵하고 성실한 중년 히라야마가 있다.
조용하며 일상과 자연의 소리가 부드럽게 들려오는 이 영화는 힐링 영화로서 많이 여겨진다. 히라야마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인데, 그 히라야마가 과묵해서 말을 하지 않으니, 영화가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 덕분에 이 인물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반복되는 일상에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며 추측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마지막에 히라야마의 클로즈 샷에서 관객은 각자의 해석과 감상을 갖는다.
히라야마의 삶에 대한 관객의 다양한 생각과 감상은 모두 정답이고 옳을 거다. 다만, 개인적인 감상으로 평범한 일상에서 사소한 행복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 씁쓸하고 쓸쓸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장면에서 트럭에서 올드팝을 들으면서 보여주는 미묘한 표정 변화. 웃다가 우는 얼굴에서 보이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의 삶은 완벽하지 않았고, 그 역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히라야마는 평범한 일상 속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느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앞서 말했듯 도쿄의 공공 화장실 청소일을 하는 히라야마는 일관된 하루 루틴을 가졌다. 빗자루 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른 아침에 일어난 히라야마는 분무기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기르는 화분에 물을 주는 일로 시작한다. 씻고 면도하고, 도쿄 화장실 옷을 챙겨입는다. 집을 나서기 전에 항상 일정하게 두는 소지품을 챙겨 들고,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청소 트럭에 오른다. 화장실 청소를 성실하고 꼼꼼히 해낸 그는 점심땐 항상 가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우유와 샌드위치를 마시며,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즐긴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꺼내, 내리쬐는 햇빛과 나무를 찍는다. 일을 마친 뒤엔, 단골 가게를 가서 하루를 마친다. 집으로 돌아온 뒤엔, 소지품을 항상 두던 곳에 두고 책을 읽다가 잠에 이른다. 그에겐 주말 일과에도 루틴이 있다. 일주간 입은 옷을 세탁하고, 필름 카메라를 현상하고 사진을 선별한다. 오래된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저녁엔 바에 가서 술을 마시며 마무리한다.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사소한 사건이 그 루틴을 깨뜨린다. 그 속에서 관객은 히라야마의 생각을 추측한다.
여러 관람평을 살펴보면, 힐링 영화로서 즐기는 분이 많은 듯하다. 실제로 잔잔한 분위기와 과묵한 주인공을 지켜보고 있으면 힐링 되는 면이 있다. 영화의 제목이 ‘퍼펙트 데이즈’ 즉 완벽한 날들인 만큼, 주인공이 사소하고도 평범한 일상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아서 완벽한 삶을 사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다 보기 전에는 ‘소공녀’라는 영화를 떠올리며 봤었다. 거주지를 잃더라도 한잔의 위스키와 담배 한 모금을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 미소가 나오는 영화. 보통의 사람이라면 쓸쓸하다 못해, 괴로운 삶으로 보임에도. 주인공 미소는 한잔의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하지 않는다.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라는 이야기다. 유사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기 시작했다.
1. 강박적으로 지키는 일상.
히라야마는 평범하지 않을 정도로 일정한 하루를 보낸다. 항상 자판기에서 똑같은 커피를 마시고, 소지품은 항상 같은 곳에 둔다. 항상 같은 가게에 가서 같은 음식을 먹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주인이 알아서 메뉴를 준다) 이는 주말에도 마찬가지다. 같은 세탁소, 같은 현상소, 같은 책방, 같은 바에 간다.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항상 같은 사진을 찍으며, 그렇게 사진을 매달 모아서 벽장 한 곳에 모아둔 게 몇 년이 된 듯하다. 변수가 없다면 완전히 동일한 일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살아갈 것만 같다. 마치 수행자 같은 느낌이다.
완벽한 일상이 아니라, 완벽하게 동일하다. 이런 동일성은 강박이다. 히라야마는 일상이 변화 없이 반복되기를 강박적으로 원하는 사람이다. 그저 그가 스스로 두는 변화는 그날그날 듣는 올드 팝의 종류와 읽는 책의 종류뿐이다. 올드팝과 독서만이 그가 선택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것으로부터 삶의 가치, 행복을 찾는 걸로 보인다. 결국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사람 같다. 그러나, 영화 속 히라야마는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소하지만 다양한 일로 인해, 반복된 일상을 유지하지 못한다.
2. 감정적 동요
일상에서의 사소한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면, 소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사람일 거다. 반대로 별일 아닌 사소한 문제에는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파민을 추구하는 사람은 감정적 요동이 상당하다.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만큼, 그 쾌락을 얻어내지 못했을 때 분노와 슬픔도 거대하다. 쉬이 상상해볼 때, 해탈한 사람, 수행자 같은 사람은 잔잔한 호수 같은 느낌이다. 소소히 행복해하고, 크게 분노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품고 있는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와 과묵한 히라야마의 성격으로 인해서, 해탈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같다. 관객은 거기서 교훈과 깨달음을 얻어가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생각이 히라야마의 울음을 마주한 순간, 깨졌다.
히라야마는 감정을 꽤 드러낸다. 강한 분노는 한 번 있고, 눈물은 두 번 있다. 그 외에도 자잘한 감정도 표현한다. 아야에게 볼 뽀뽀를 받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 동생을 만난 뒤 우는 것, 일을 두 배로 하게 된 날 쏟아내는 분노 등은 그가 강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범인임을 나타낸다.
그가 철저히 유지하는 반복은 일종의 수행자처럼 보인다. 무엇을 수행하려고 그러는 걸까.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추측해야 할 뿐이다. 히라야마의 조카를 데리러 오기 위해 찾아온 동생은 좋은 차에 운전기사까지 대동해서 나타난다. 딱 봐도 우아하게 부유한 사람. 동생의 도움을 받아도 충분히 근사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왜 인지, 느낌으로 추측하자면. 동생의 부유함이 아니라, 집안의 부유함 일 것 같다. 원래 잘사는 가족이었고 사업가 부모의 재력이고 그걸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히라야마가 포기해서 동생이 물려받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저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그렇게 동생을 안아주고 보낸 뒤에 히라야마는 왜인지 서글픈 눈물을 흘린다.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동생과의 대화에서 보면, 동생과 아버지를 포함해 가족과 소통하지 않는 걸로 보인다. 찾아뵙지도 않으며, 동생은 히라야마의 집에 처음 온 듯했다. 사진 박스를 모아둔 걸 보면 히라야마의 이런 생활은 이미 몇 년이 된 것임에도, 처음이니까. 꽤 오랜 시간 홀로 살아온 거다.
가족과의 관계와 자신이 받고 있던 어떤 세상의 압력 같은 것에서 괴로웠던 과거가 있던 게 아닐까. 동생을 마주하자, 그 과거가 떠올랐다. 이어서 지금에 이른 일련의 과정이 생각난 건 아닐까. 그러면서 자신이 포기한 많은 게 떠올랐으리라.
히라야마는 수행자처럼 살지만, 결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니다. 후배가 한 외롭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아야에게 뽀뽀 받고 활짝 띄는 웃음이나 조카와 시간을 즐겁게 여기는 것. 가족이 왔다 간 후 느낀 슬픔. 바 술집 사장님의 전남편 재회를 마주한 뒤에 느낀 쓸쓸함은 모두 그가 외로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단순히 가게에 가지 못해 주말 루틴이 깨진 거에 불과하다면, 피워본 적 없는 담배를 사서 피려고는 하지 않았으리라.)
일을 두배로 하게 된 날, 회사에 세 번이나 전화해서 소리치며 화를 내는 그 모습에도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 왜냐면, 너무나도 일반적인 사람의 태도였기 때문이다. 예고도 없이 밤새 일하게 되고, 전화도 받지 않으면 화가 난다. 그런데도 계속 보여주던 수행자라면 자신이 감정을 잘 통제한 뒤에, 과묵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점잖게 말하는 게 수행자 아닐까. 그러나 히라야마는 그러지 못했고 여전히 평범한 범인임을 보여준다. 외로움도, 분노도 느끼는 일반인 말이다.
이러고 나니, 반복되는 일과도 이해된다. 히라야마는 반복된 루틴을 통해서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고자 했다. 동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변화없는 삶을 반복한다. 크게 행복하지도 않지만, 덕분에 크게 괴롭지도 않은 일상을 가지기 위해서.
3. 웃다가 울기
히라야마는 마지막 장면에서 웃다가 운다. 웃는 것과 우는 것, 어떤 감정이 본심일까.
수행자 같은 강박적 일상과 대비되어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들은, 평소에 그가 그 감정을 억누르고자 애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참다못해 터져 나오는 듯한 그런 감정들을 이야기 내내 몇 차례 마주했다. 그러고 나서, 웃다가 우는 장면을 보았기에, 히라야마는 웃고자 노력했으나 슬픔이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해 울어버리는 걸로 느껴진다. 본심은 슬픔이다. 억누르던 감정이 폭발해 그의 강박적 일상이 붕괴한다.
추측건대, 히라야마는 도망쳐 온 건 아닐까. 가족과 세속적 삶에서 도망친 사람으로 보인다. 혹은 사회의 경쟁 같은 거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이다. 그 후, 그는 올드 팝과 독서, 사진, 식물 같은 것을 목적 삼아 일상에 만족하려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직업적으로 얻어지는 정체성 만족이나 연애, 결혼 같은 인간적 관계에서 오는 삶의 충만함을 스스로 포기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히라야마는 평범한 일상 속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 느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
사회로부터 도망쳐 나와 동 떨어져 버린 사람. 사회가 주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괴로움, 고통, 좌절감 같은 것으로부터 도망친 결과, 그것이 주는 만족과 행복감도 포기해야만 했던 사람.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거대한 괴로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큰 행복과 만족을 포기해야만 했던 사람. 그래서 별수 없이 작은 것에 행복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깨부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삶의 행복과 만족을 인식해버렸다. 현재의 삶에 만족해보려고, 애써 웃음을 지어보지만 되지 않는다. 여전히 일반적 사람들의 삶을 포기하지 못한 자신을 깨달음과 동시에 현재의 자신은 거기서 동 떨어져 있음을 안다. 밀려오는 좌절을 참아낼 수 없던 그는 눈물을 흘린다. 웃으려 했지만, 결국 슬픔이 터져 나온 장면이다.
그는 지금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웃으려 했지만,
그 삶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했다.
4. 소회
‘소공녀’을 봤을 때처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고집으로 살아가는 곧은 인물을 기대했다. 자신만의 강한 취향과 삶의 태도를 보이며, 지켜보는 관객이, 대리만족하거나 깨달음을 얻는 그런 영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히라야마의 표정에 나는 그런 걸 얻지 못했다. 그 역시도 나와 같았다. 그는 도망치고 포기했다. 그러나 완전히 저버리진 못한 완벽하지 못한 사람. 동질감에서 오는 슬픔만이 강렬히 남았다.
너무나도 슬픈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