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시간 사용하기

전쟁 같던 수능이 끝나고.

by SueSue

하루 종일 만화책 보기

한 달 동안 그림만 그리기


약 30년 전, 수능이 끝나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눈앞에 닥친 시험에 대한 걱정보다도

머릿속으로는 뭐 하며 놀까 하는 궁리로 즐거웠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내 수준에 맞는 점수를 받고 내 수준에 맞는 학교를 고른다.

단지 내가 가고 싶던 과가 있는 학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수능 날은 19살 인생 중 가장 긴장된 날로 기억한다.

가족 중에 처음 수능을 보는 자라는 이유로

부담스럽게도 온 가족이 숨 죽였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수능 날, 고사장으로 배정받은

시내에 있는 한 고등학교로 갔을 때

옆 줄 몇 자리 앞에 우리 학교 전교 1등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같은 반이었는데,

그 애는 너무도 편안해 보이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항상 그랬듯 평화롭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쟁터처럼 느껴졌던 시험장 가운데에서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시험날이 지나고

다음날 등교했을 때

수험표에 본인이 적어온 답으로 가채점을 해보고

우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실제 점수가 나오고, 대학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등교를 하는 동안 3개월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방학이 되기 전 약 한 달 동안

학교에서는 수업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영화를 상영해 주거나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누구도 지켜보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숨 죽인 차분한 상태로 한 달을 지냈다.


나는 계획했던 대로

교실에서 만화책을 보는 자유를 누렸다.

친구들은 만화책을 각자 시리즈 별로 빌려왔고

평소라면 압수당했을 만화책을 책상 위에 쌓아 놓고

돌려가며 읽었다.


집에 오면 그림을 그렸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 일을

돈이 들어갈 뿐, 돈이 되지 않을 그 일을

거실 한가운데에서 보란 듯이 하루 종일 했다.


보기 좋은 바구니에

사과 몇 알을 담고 샤프펜으로 정밀묘사를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 완성에 몇 주 걸렸다.

지금 생각해도 잘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내가 모르는 사이 동생이 학교 방학숙제로 제출해 버렸다.

무신경하게.


그 후로 동생은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내게 그림 주문을 했다.

학교 방학 숙제로 장당 1,000원 정도 불렀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는 "네 숙제는 네가 해라"며 거절했다.


지금처럼 인터넷, SNS, AI가 일상이었다면

앞으로 어떤 재미있는 것들을 할지 찾아보고

계획하느라 눈코뜰 새 없었을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전쟁 같은 직장생활을 약 20년 넘게 하면서

체력도 많이 상했다.


30년 전 수능 점수를 받아봤던 날처럼

직장생활도 내 수준에서는 만족스러운 점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을 줄여가고 있는 요즘 또다시 즐거운 고민에 빠져있다.

이번에는 더 긴 고민이다.

무엇을 하며 내 시간을 쓸까.


장기 계획이 필요하지만 요즘은 그냥 하루하루가 편안하고 좋은데

그래도 즐거운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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