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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Oct 20. 2022

단지, 사랑할 뿐

갑작스레 추워지긴 했지만 요즈음의 날씨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여러 모습이 있지만 최근의 나는 아이와 등하원하는 길이 가장 행복하다. 코끝이 서늘해지는 싸늘한 날씨지만 계속해서 안아달라, 달려가자, 간식 달라 조르는 아이 덕분에 온몸에 땀이 한 바가지 나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며 활짝 웃는 아기의 얼굴에 가을 햇볕이 쏟아지면, 나는 행복감을 느낀다. 아이를 향한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 행복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만날 일이 잦았다. 다들 저마다의 육아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이제 막 두 달을 넘긴 갓난아기를 키우는 친구는 자신과 남편의 육아휴직 이후 아이를 누가 돌봐야 할지 고민이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은 워킹맘 친구는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서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 잠을 자지 않겠다 하는 딸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은 워킹맘 친구는 자신이 육아를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없다며, 엄마보다 아빠를 찾는 아이의 모습에 심리적 고립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4살, 1살 자매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인 우리 언니는 아이들과 있는 순간에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고 말했다.


육아에 부담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부족하고 못나고 때로는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그들의 사진첩에는 아기들의 사진과 영상이 가득하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무수한 순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이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을 기록한다. 그 장면 그 순간만큼은 아이와 엄마 모두 사랑을,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그 마음이 아주 찰나일 지라도.



육아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일을 잠시 쉬며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나도, 복직 후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는 친구들도 모두 아이를 잘 길러내고 싶다. 그렇다면 아이는 왜 잘 키워져야 할까? 아이의 인생에 큰 굴곡이 없기를, 아이가 살면서 큰 절망과 고통을 느끼지 않기를, 아이의 삶 속에 행복한 순간이 많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이가 혼자 힘으로 자신의 삶을 잘 일궈내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하지만 아기들은 잘 키워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아기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졌고, 아기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낳아버린 부모는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 책임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전해진다. 동물로서의 인간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번식을 한다지만, 결국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은 자식을 향한 마음, 사랑뿐이다.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단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요즘에는 사랑의 형태를 특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최근, 남편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다. 온 가족이 코로나 확진이 된 와중에 나만 유독 증상이 심했다. 밤새 침을 삼키지 못할 정도로 목이 아프면서 끊임없이 갈증을 느꼈다. 머리맡에 물컵과 빈 그릇을 둔 채, 밤새도록 기침을 하다 목이 마르면 입 안에 물을 머금고 있다가, 차마 삼키지 못하고 빈 그릇에 뱉길 반복했다. 아기 옆에서 콜록대며 정신을 못 차리는 내 모습을 보고도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살고 있는 동거인이라면 마땅히, 아픈 사람이 있으면 “괜찮냐, 많이 아프냐, 어디가 아프냐” 물어봐주는 것이 도리이고, 사랑의 표현인 것을. 걱정하는 눈빛도, 한마디 물음도 없는 남편이 야속했다. 몸이 아플 땐 마음도 약해져서 작은 행동도 서운해지는데, ‘사랑이란 따뜻한 애정표현’이라고 여기는 나는 남편의 행동에서 한 조각의 사랑도 발견할 수 없었다.


상태가 호전된 후, 남편에게 “그때 왜 나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냐”라고 묻자, “안 괜찮은 게 눈에 뻔히 보이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지 않나. 답이 뻔한 질문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너의 몫만큼 아이를 돌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라고 말했다.


10년 전, 남편의 고백을 듣고 내가 뱉은 첫 문장은 “나랑 사귀면 애정표현 많이 해야 돼”라는 말이었다. 나에게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해야 하고, 내가 추워하면 따뜻한 손으로 내 팔을 쓰다듬어주어야 하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과 얼굴에서 ‘너를 사랑함’이 느껴져야 한다. 나는 연애와 결혼 생활 중 “내가 왜 좋아, 어디가 좋아”라는 질문을 끝없이 했고 남편의 구체적인 대답이 돌아와야 안심하곤 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인지 확인받고 싶었다.


남편에게 사랑은 뭘까. 남편은 지극히 내향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이다. ‘내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고, 관심 없는 사람과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를 싫어한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본인의 의무와 도리를 다 하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끼리 조용히, 평화롭게 보내는 주말 오후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친구들을 줄기차게 집으로 불러 밤늦게까지 떠드는 것에 토를 달지 않았다.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내가 지쳐서 쉬고 있으면, 퇴근 후 피곤한 상태여도 아이의 요구에 맞춰 책을 읽어주고 밀린 집안일을 말없이 해낸다. 남편에게 사랑은 ‘마땅히 내어주는 마음’이다.


10년 동안 내가 바라는 사랑의 기준에 맞춰, 내가 원하는 애정표현을 해주었던 남편.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깨달았다. 내 기준이 세상의 기준이 아니고, 내 사랑의 방식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사랑이 아니라는 걸.

그 사실을 깨닫고 나의 육아관, 육아의 목적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단지, 사랑하기만 하자. 아이를 잘 길러내야 한다는 의무도, 너를 훌륭한 어른으로 키워야 한다는 부담도 모두 내려놓고 그저 매 순간 너를 사랑하겠노라고. 지금까지 고수해 온 특정 방식의 사랑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을 하겠다고. 그것은 때로는 내가 원했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사랑’일 수도 있고, 남편이 품었던 ‘마땅히 내어주는 마음’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자녀양육에 최선을 다하는 ‘너의 성장을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최근 언니는 산후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두 아이를 혼자 돌봐야 하는 저녁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예전 같으면 행복했을 아이들과의 시간이 이제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자신에겐 그 어떤 뜨거움도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우울 증상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 언니에게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같잖은 조언을 아무리 늘어놓아도 언니의 고민을 해결할 답은 보이지 않았다. 언니와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나는 그저 ‘언니가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언니는 아이들과 있을 때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내 눈에 언니는 그저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엄마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고 치열하게 이겨내려 애쓰는, 누구보다 뜨거운 사람이었다.


지독한 무기력증을 겪으면서도 언니는 아이 돌보기를 쉬지 않았다. 모든 순간 아이들에게 웃어주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이 길을 나서면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언니는 첫째 아이의 하원길에 매일 늦지 않게 도착했다. 집 밖에 있는 시간들이 지독히도 싫지만, 아이가 가고 싶은 길을 통해 돌아 돌아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음에도 6개월 된 둘째의 분유 타기를, 기저귀 갈기를, 밤새 토닥이며 재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언니에게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내는 마음’이다.



아이가 바라는 사랑은 어떤 형태일까. 우리가 아이에게 주고 있는, 받고 있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모든 관계에서 사랑은 내가 원하는 수준을 맞추지 못한다. 때로는 부족하게 때로는 과하게 때로는 원하지 않는 형태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행복의 순간은 찰나일 뿐, 행복하지 않은 시간이 무수히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견디고, 버티고, 이겨낸다.

육아에 대해 고민할 거리가 산더미지만, 그럼에도 이것만큼은 분명히 생각했으면 한다.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은 어떤 방식이었는지,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아이를 길러내는 것에 불안을 가지지 않는 부모는 없고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이것만큼은 확신을 가졌으면 한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가족과의 관계에서 수많은 의무와 도리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랑할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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