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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Mar 01. 2021

어떤 시뮬레이션

[가족이라는 세계] 할머니와 자란 손녀의 마음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할미'다. 하는 행동이나 말이 할머니 같다는 의미로. 할머니와 20년을 살다 보니 할머니의 버릇이나 말투를 많이 닮게 됐다. 얼굴도 할머니부터 아빠, 나까지 이어져 오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서 누가 봐도 가족임을 알 수 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가 나의 주 양육자였고, 성인이 되기까지 나는 늘 할머니 옆에서 잤다. 초등학생 땐 할머니가 가꾸던 텃밭에 같이 나가서 수다 떠는 게 낙이었고, 하굣길에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밭두렁 과자를 사 오곤 했다. 집에 오면 라디오로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좋았고, 바퀴벌레도 맨손으로 척척 잡아내는 할머니가 멋있었다. 음식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먹었던 나에게, 할머니는 한 번 잘 먹으면 같은 반찬을 몇 달씩 주셨고 그런 점이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가장 예쁨 받는 손주였다. 물론 철없는 시절에는 밥 먹을 때 할머니가 중얼중얼 말씀하시는 게 싫어서 짜증을 낼 때도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오게 되어 고향 집을 떠날 때는 할머니를 보지 못하는 슬픔에 버스에서 눈물을 흘렸고, 입학한 첫 에는 술에 취하면 할머니 보고 싶다고 우는 주사가 있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친구들이 놀린다.


그러다 몇 년 전 할머니가 고관절 골절로 입원하시는 일이 생겼다. 활동적이고 건강했던 할머니가 병실에 누운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할머니는 병원 입원 후 섬망 증상으로 의료진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해서 모두가 애를 먹기도 했다. 병원에 적응하지 못한 할머니가 밥을 한 술도 뜨지 않을 땐, 나는 그 옆에서 갖은 애교를 부리며 한 술 뜨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섬망 증상이 심해져 나를 몰라봤을 땐 병실을 나와 온 몸으로 울었다.


다행히도 그 후 할머니는 잘 회복하셔서 지금은 집에서 지내지만, 그때 이후로 언제든 할머니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내 삶의 모토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하자'는 것이어서 할머니가 편찮으셨을 때는 주말마다 고향 집에 내려갔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를 더 자주 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죄송스러운 때가 많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내려가서 할머니와 손잡고 몇 시간씩 수다 떨면서 잠들고 가끔은 할머니를 모시고 집 앞 미용실에 간다. 할머니는 나와 미용실 가는 순간을 몇 달 동안 기다리신다.


이따금씩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난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주로 퇴근길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하는 생각인데 몇 년 전 아빠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연락받았을 때 이후로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됐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다.


아마도 엄마나 아빠 혹은 그 소식을 먼저 들은 언니가 나에게 전화를 할 것이고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정신없이 울며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를 탈 것이다.

차를 타고 고향 집으로 가며 할머니에게 했던 못된 말이나 잘해 드리지 못한 것들을 먼저 생각하게 되겠지만 나는 이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할머니와 좋았던 추억을 되새기려 노력한다.



내가 집에 오길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환하게 웃으면서 반겨주는 할머니 얼굴, 미용실에 다녀오면 흡족한 모습으로 거울을 보며 자신의 새하얀 머리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모습,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한 손은 임신한 내 배를 만지면서 내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의 행복감. 항상 시뮬레이션 끝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의 이러한 시뮬레이션은 충격과 아픔을 덜 해줄 수 있는 장치가 될까? 나는 시뮬레이션이 실제가 되는 그 순간, 웃으며 할머니를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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