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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Mar 03. 2021

겁쟁이, 트라우마

[가족이라는 세계] 겁쟁이 어린이가 겁쟁이 어른이 된 이야기

나는 어릴 적 엄청난 겁쟁이였다. 어릴 적 가장 두려웠던 순간을 떠올린다면 '혼자 갇혀있는 순간'이다. 어릴 적 병설 유치원에 떨어져 학원에 다녔는데, 화장실에 불이 고장 나서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옆에 있던 할머니에게 빛이 살짝 들어오도록 화장실 문을 잡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원장님과 대화하던 할머니는 문을 놓아버렸고 나는 깜깜한 공간에  혼자 갇혔다. 어둠 속에 혼자 갇히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 나니, 그대로 트라우마가 되었다.


가장 싫었던 건 집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었다. 낮잠 자다 일어나면 집에 아무도 없어 목 놓아 울며 할머니를 부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진짜 나 혼자였던 순간은 별로 없고 대부분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할머니가 여기 있다고 답했다. 밤에는 할머니 방에서 함께 잠을 잤는데 할머니는 새벽마다 텃밭을 나가서 아침에 눈을 뜨면 까만 방에 나 혼자만 남았다. 그게 싫어서 자기 전에 할머니가 자리를 뜨지 못 하게 할머니의 옷자락을 꼭 잡은 채로 잠들었다.



정확히 내가 어떻게 '어둠' 그리고 '혼자' 남겨지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레 극복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매번 상황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시절 이모집에 하숙할 때도 어두운 방에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웠지만 거실에서 들리는 이모 웃음소리에 집중하며 혼자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내였다. 혼자 사색하는 것에 더 집중하면서 무서운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잘 때 인형을 안고 자는 것도 효험이 있었던 것 같다. 딱히 노력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하지만 겁쟁이였던 나를 한심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 집에 있는 것이 익숙하고 깜깜한 방에서도 혼자 잘 수 있다. 예전처럼 '혼자' '어두운 공간'에 갇혀있는 것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다. 물론 집에 혼자 있다가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가끔 소스라치게 놀라고 웬만하면 혼자 있을 땐 누가 초인종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집에서는 화장실 문도 조금 열어두고 이용하긴 하지만.


나의 또 하나 약점은 ‘운동’이다. 어릴 적부터 운동이란 운동은 다 못했다. 지금도 운동은 무엇이든 싫어한다. 가장 싫었던 건 체력장, 운동회, 체육 시간이었다. 체육 실기점수는 전교 꼴찌였고 체력장도 늘 최하점을 받았다. 100m 달리기에선 늘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체육 시험을 볼 땐 모두의 앞에서 넘어지거나 공을 놓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렇게 남들 앞에서 실패를 반복적으로 보이다 보니 점점 더 운동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가장 무서웠던 건 수영이었는데 수영 시험을 볼 땐 아예 몸이 굳어 물에 뜨지 않았다. 계곡이나 바다에 놀러 갈 때마다 떠내려 가거나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경험을 여러번 겪었다. 바닷가 마을에 살면서 물을 이토록 무서워할 수 있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운동 능력을 시험할 일이 없었기에 운동을 못 하는 것이 내 삶에 크게 영향을 주진 않았다. 다만 사람들과 등산을 할 일이 있거나 자전거를 타야 할 때 아예 뒤쳐지거나 다른 곳에서 농땡이를 피운다. 운전도 도로 주행에서 몇 번의 탈락을 겪고 나서야 겨우 면허를 땄지만 모두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10년 가까이 장롱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운동 능력은 타고나는 걸까, 노력으로 극복 가능한 걸까. 엄마는 체육 수업을 들을 때 악착같이 연습해서 좋은 성적을 따냈다고 한다. 아빠는 나처럼 운동 신경이 좋지 않지만 못 타는 자전거를 60이 다 되어 다시 배우러 다닌다. 언젠가 운동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엄마처럼 악착같은 자세로 그리고 아빠처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트라우마는 극복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도달했을 때 나의 약점 자체를 인정하고 그대로 마주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나 역시 완벽한 트라우마 극복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어릴 적엔 크게 느껴졌던 그 약점들이 지금은 내 인생에 큰 방해물이 되지 않음을 알고 개의치 않으며 살아간다. 대신 다른 약점들이 더 크게 느껴지고 다른 부분에서 겁쟁이가 되었지만 나는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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