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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Nov 01. 2021

아이는 가을처럼 자라고, 엄마는 단풍처럼 물든다

지난 주말, 아이가 드디어 자립을 했다.


이제 13개월에 접어든 아이는 평균보다 몸무게가 작다. 정원이 30명인 어린이집에서 유일하게 신발을 가져가지 않는 아이. 같은 반 친구들이 제 발로 걸어 등원할 때, 언제나처럼 내 품에 안겨 등원하는 아이다.


지난주, 어린이집 선생님이 신발을 챙겨달라 말씀하셨다. 오전에 한 번 다 같이 산책을 나가는데, 우리 아이는 발까지 막혀있는 우주복을 입혀 보내곤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 제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며 노는데 혼자 멀뚱히 앉아 놀 수밖에 없다며, 이제부턴 신발을 신겨 일어서는 연습을 시켜보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딱 하나, 우리 엄마가 사주셨던 노란 아기 신발이 있어 다음날 챙겨 보냈다. 그날 키즈노트에는 엉거주춤 자세로 일어서 있는 아이의 사진이 올라왔다.


다음 날, 주말 출근한 아빠가 돌아와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짐을 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아빠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지 한껏 흥분해서 일어섰다가,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다가, 다시 힘을 주어 일어섰다. 나는 그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엄마와 아빠의 환호에 신이 난 아이는 스쿼트 하듯이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저녁밥을 먹인 뒤 아이에게 오후에 찍어둔 영상을 보여주니 활짝 웃으며 다시 일어섰다. 영상 속에서 내가 '박수!'라고 외치니 아이는 스스로 박수를 치며 또다시 일어섰다. 오후엔 금방 힘이 풀려 앉아버렸는데, 이번엔 이리저리 균형을 맞추며 제법 오래 서있는다. 아이는 잘한다 잘한다 외치는 엄마 아빠 얼굴을 번갈아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남편은 흥분하며 이 소식을 가장 기뻐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의 가장 큰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어머님.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고, 만날 때마다 선물을 한아름 안겨주시고, 어떤 행동을 하든 큰 소리로 환호하고 기뻐해 주시는 분이다. 아이가 힘주어 일어선 모습을 보자 어머님은 "거봐! 걱정하지 말랬잖아. 금방 설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씀하셨다. 본래 이맘때 아이들은 성장 속도가 제각각이라, 18개월까지만 걸음마를 시작하면 정상범위라고 말씀드렸었는데 내심 걱정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친척 중에 유치원에 갈 나이임에도 서지 못하는 아이가 있어 혹시 우리 아이도 그럴까 봐 우려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다음 주면 걸을 수 있겠다며 안도의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다음 날엔 집 근처 공원으로 나섰다. 우리 엄마가 사준 노란 신발과 깔맞춤으로 노란 모자와 돗자리까지 챙겼다. 바깥 환경에 낯설어하는 아이에게,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주었다. 과자를 몇 개 집어먹은 아이는 기분이 좋아져서 팔을 흔들며 우뚝 일어섰다. 편안한 환경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도 설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언제 어디서든 혼자 일어설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다. 기분 좋을 정도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노오란 가을볕 아래. 아이의 자립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천천히 벅차올랐다.



그리고 오늘, 긴 낮잠에서 일어난 아이와 단 둘이 동네 산책을 나왔다. 단지 내 인적이 드문 인조잔디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갈색 가을 낙엽을 주워 들었다. 가을을 닮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분명 얼마 전까진 반팔을 입고 있었는데 어느새 긴 옷을 꺼내 입었고, 초록이 무성했던 나무는 문득 가을빛이 되었다. 눈치챌 틈도 없이 노란빛 붉은빛으로 물든 나뭇잎은 눈이 부시도록 고왔다.


단풍잎 같은 손으로 야금야금 모아 쥔 은행잎을, 아이는 내 손에 가지런히 두었다. 작년 이맘때 아이를 처음 만나고 제대로 된 가을을 처음으로 맞이하고 나니 나는 이미 단풍처럼 물들어있었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아등바등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아이는 언제나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이는 서서히 성장하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렇게 가을처럼 성장해있다. 매일이 나에게서 멀어져 스스로 걸어 나가기 위한 과정임을 떠올리면 바스락 부서지는 낙엽처럼 쓸쓸한 마음이 들곤 하지만, 짙게 물든 단풍잎을 보며 함께 보낸 계절들을 돌이켜본다.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병아리 같은 노란 옷을 입고 산책을 나섰던 순간이 담겨있는 가족사진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지 일 년쯤 되었을 무렵이었고, 나는 작은 두 발로 혼자 서있었다. 내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미소는 가을볕처럼 설레었고, 단풍잎처럼 불그스름했다.


아이는 문득 가을처럼 자라고, 엄마는 서서 단풍처럼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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