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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Dec 03. 2021

아이를 기르다, 나를 기르다


요즈음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느끼는 점은, 육아는 결국 '나를 기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신생아 시절은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과정이었기에 '모성애 뽕'이 차오름으로써 이겨내는 시기였다. 아기의 귀여움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시기.

어른과 비슷한 밥을 먹고, 스스로 걷고, 여러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대화를 하면서부터는 육아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아이의 의식주 모든 것을 내가 돌봐줘야 하는 상황임은 변함이 없지만, 아이가 엄마와 자신을 구분해서 생각하며 자아가 생기듯이 엄마도 다시금 자아를 찾아가게 된다.





돌이 지나면서 아이는 급격한 성장을 한다. 이전의 육아 방식에 적응되어버린 엄마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갑작스럽게 맞춰가본다. 사실 육아는 아이의 성장보다 한 발 앞서 있어야 하기에 엄마의 마음은 더욱 급해진다. 아이가 발을 떼고 나서야 나는 급하게 발에 맞는 신발을 사기 시작했고, 아이가 내 말들을 조금씩 따라 하기 시작하자 언어교육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공부하고, 월령에 맞는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엄마가 급히 준비한 것들은 아이가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는다. 아이는 그동안 나와 시간을 보내며 보았던 것들, 엄마는 그저 흘려보낸 일상에서 모든 것을 배운다. 새롭게 사준 책에서 열심히 읽어주는 단어를 따라 읽기보다는 평소 엄마가 자주 말하던 단어들을 먼저 말한다. 우리 아기의 첫 단어는 '우와'였다. 나는 항상 아기가 무언가를 잘 해내면 '우와! 박수! 대단하다! 정말 멋지다!'라고 외쳤고 아이는 그때마다 입을 한껏 벌리며 웃었다.


내가 인위적으로 입력시키는 '버스', '사과', '파란색' 같은 단어보다, '우와', '박수!' 같은 일상의 언어들이 아이에게 더 강력하게 다가가는 것이다. 결국 엄마가 평소에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사는지가 아이의 언어 발달에 영향을 주는 셈이다. 아이와 일방향이 아닌 '대화'를 한다는 것은, 아이를 한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소에 쓰는 언어에서  사람의 생각, 사고방식을 읽을  있다. 결국 엄마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 자신에 대한 확신이 언어로 드러나고, 그것을 아이가 듣고 배운다. 아이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도 평소에 아이에게  말을 해줬어야 하고,  이전에  자신에게도  말을 해주었어야 한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듣고 싶다면, 평소에 엄마이런  좋아한다고 말했어야 하고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했어야 한다.





다른 아기들보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위해 예쁜 구두, 따뜻한 털 운동화, 편한 신발 이것저것을 사줬다. 그러나 아이는 항상 내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다. 걸었으면 하는 순간에는 빠르게 기어 오고, 얌전히 앉아서 갔으면 하는 차 안에서는 벌떡벌떡 일어나 걷고 싶어 했다.


그러다 문득 아이와 눈이 마주쳐 아이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누워있었다. 육아를 하면서 나는 대체로 누워있다. 일어서서 율동하며 놀아주기 보다는 어딘가에 기대어 놀잇감을 펼쳐주곤 했다. 아이 돌보기와 집안일을 하다보면 금방 지쳐 눕게 된다는 핑계였다. 아이는 활동적으로 움직이다가도 누워있는 내 품 속으로 들어와 함께 눕곤 했다.

행동은 말보다 빠른 전염력을 가진다. 나는 아이와 더 잘 놀아주기 위해, 아이가 빠르게 걸음마를 익힐 수 있도록 더 많이 움직이고 걸어야 한다. 아이의 체력을 길러주기 전에 내 체력이 먼저 길러져야 했던 것이다.





300일을 맞이한 내 친구의 딸은, 300일 겸 돌사진으로 예쁜 사진을 찍었다. 우리 아기를 제외하고 내가 아는 아기 중 가장 예쁜 그 아이는 예쁜 드레스를 입고 엄마 아빠와 환하게 웃으면서 예쁘게 사진을 찍었다. 100일 촬영 때는 너무 울어 다 찍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던 그 아이. 300일 촬영 때는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컨디션이 좋아져 방긋방긋 웃으며 기분 좋게 촬영을 했다고 한다. 친구는 내게 가장 예쁜 사진을 골라 보내주고, '우리 엄마가 나를 낳은 이유를 알았어. 우리 아기를 낳으라고 낳은 거였던 거야. 내가 공주를 낳았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은 직접 보지 못 했지만 어떤 얼굴이었을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엄마는 아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통해 나의 존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소중하게 아이를 기르면서 이보다 더 소중한 마음을 품었을 우리 엄마를 떠올리고, 나를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시킨 그 노고를 실감한다. 나는 우리 아이만큼 소중하게 길러졌다.


인생에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고, 아이로부터 큰 행복을 얻었다. '우리 아기를 낳으려고 내가 태어났나 봐'라는 말에는 내 남은 인생이 아이로 인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있다.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만큼 로맨틱한 사랑 고백이 있을까.


친구의 아기가 기분 좋게 사진을 촬영한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100일 때보다 엄마 아빠가 더 좋아져서, 아침에 엄마가 줬던 밥이 맛있어서, 오는 길에 엄마가 불러준 노래가 좋아서, 엄마 아빠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기분이 좋아서였을 수도 있다.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갑자기 되는 일'은 없다. 돌이켜 보면 작은 원인이 있었고 사소한 계기로 큰 변화가 오기도 하더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이를 바라보는 태도가 되고, 또 아이가 나를 보는 시선이 된다. 내가 하는 말속에서, 평소에 취하는 자세에서, 하루 중 대부분 짓고 있는 표정에서 삶의 태도가 담기고 아이는 그것을 오롯이 체득한다. 아이를 기르는 과정은 결국 나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는 과정이며 그렇게 나는 아이와 함께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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