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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Nov 10. 2021

아이가 아프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어느덧 인생 13개월 차를 맞이한 나의 2세는, 어제 처음으로 체온 38도를 찍었다. 평소와 같이 아이를 등원시키고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시간 후에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방문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상태를 보는데 체온이 38.2도까지 오르고 손발이 차다고, 바로 하원하는 게 좋겠다고. 원체 땀이 많은 아이라 항상 뜨끈해서 미처 몰랐다. 호다닥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니 원장님까지 나오셔서 아이 컨디션과 요즈음 원아들 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다. 당분간은 가정보육하는 게 좋겠다 말과 함께.


대부분 이맘때 돌치레를 겪기도 하고, 급작스러운 추위에 다들 감기를 한 번씩 앓았는데 우리 아이는 어째 조용하다 했다. 선생님이 모유수유 덕분인 것 같다고 하셔서 으쓱해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렇게 열이 오르다니. 그 어느 것도 내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최근 두 달 동안 하루 3시간 꼬박 어린이집을 보내다 오랜만에 가정보육을 하니 익숙한 듯 낯설었다. 어린이집을 안 가는 주말과 같은 하루지만, 오늘은 남편이 없다. 남편은 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올 것이고, 그전까지 아이의 곁에는 내가 계속 있어야 한다. 여기까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아픈 상황은 평소와 꽤나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약을 먹일지, 병원을 가야 할지, 밥을 먹여야 할지, 죽을 먹여야 할지. 평소보다 많은 결정사항들이 생겨나는데 그에 따른 책임이 내게 있기 때문에 더욱 혼란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분명 등원 전까지는 컨디션이 좋고 밥도 잘 먹었는데 38도를 찍었다고 하니 아이의 컨디션이 유독 안 좋아 보인다. 평소와 같이 잠투정을 하더라도 왠지 더 힘들어 보이고 축 처지는 듯하다. 비가 오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 아이를 둘러업고 병원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어깨가 시큰해져 온다. 힘없는 아이를 보니 해열제만으로는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아이를 꽁꽁 싸매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숨이 차도록 계단을 올라 도착한 병원은 나만 다급하고 모두가 여유로워 보였다. 기다림은 길고, 진찰 시간은 순식간이다. 결국은 엄마가 상태를 잘 살펴봐야한다 뻔한 이야기를 듣고 나오면서도, 혼자 끙끙 걱정할 때보다는 마음이 가볍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 것도 아닌데. 걱정 어린 의사 선생님의 얼굴과 괜찮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상한 표정을 보기 위해 병원에 간 것인보다.


하필이면 처방받은 약이 똑 떨어져, 여기저기 약국을 전전하 집에 돌아오니 내 몸에 땀이 흥건하다. 뻐근한 팔에서 아이를 내려놓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방안을 뽈뽈 돌아다닌다. 병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추욱 처져 있었는데 아무런 주사도, 약도 먹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상태가 좋아진다니. 아이는 그저 나와 산책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간호사 모드에서 친구 모드로 급히 전환해 아이가 집는 장난감으로 놀이를 시작한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니 왠지 더 성심성의껏 놀이에 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보다 더 따뜻한 목소리로, 한 옥타브 높은 텐션으로 놀아주니 아이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아이는 그저 나와 있는 힘껏 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열이 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엄마, 언니,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제각기 자신만의 경험담을 통한 솔루션을 주었다. 따뜻하게 걱정을 해주면서도 냉철하게 대응방법을 읊어주는 그들 역시, 아이가 처음 아팠을 때는 나처럼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고 우려스러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별것 아닌 것에도 지레 겁먹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육아 선배들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다행히 아이의 열은 금방 내렸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하지만 밤이 되니 잠투정을 평소보다 심하게 했고 어딘가 불편한 듯 아픈 울음소리를 내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남편과 늦은 시간까지 아기 재우기를 시도했고 약 1시간의 혈투 끝에 미션을 성공했다. 그다음 날도 아이의 열은 높지 않았고 컨디션도 좋았지만, 잠이 올 때면 심하게 투정을 부렸다. 그럴 땐 따뜻하게 안아주어도, 좋아하는 과자를 주어도, 좋아하는 풍선과 스티커를 쥐어줘도, 재밌는 표정으로 노래를 불러주어도 소용이 없다. 요즈음 말도 통하는 것 같고 애교도 많아지고 크게 우는 일도 없어서 '육아할 만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신생아 시절의 육아로 돌아가 잊혀진 기억을 되새겨주었다.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아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육아의 막막함.



아이가 아프고 나니 하루 3시간 온전히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큰 쉼이었는지 알게 되었고, 어린이집 선생님의 전문성과 그 역할이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또 아이와 최선을 다해 놀아주는 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고, 육아는 역시 쉽지 않고 아이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게 되었다.


아이는 앞으로 며칠 더 매운맛을 유지할 것 같다. 오늘도 재우는 일이 평소보다 배로 고되었지만 아이가 매운맛이었던 덕분에, 나는 아이를 평소보다 오래 안아볼 수 있었고, 손발을 더 자주 쓰다듬어 줄 수 있었고, 더 많은 장난감으로 더 신나게 놀아줄 수 있었다. 아이의 눈을 더 오래 바라보면서 무엇이 불편한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궁금해하고 기다릴 수 있었다.

아이가 혼자서도 잘 논다는 핑계로 이전보다 불성실하게 놀아주었던 나를 반성하고, 아이가 건강히 밝은 모습으로 노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되새겨본다. 훗날 아이가 훌쩍 커버린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그리워할 것을 알기에 아이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다. 눈을 뜨고 있는 때에는 눈을 바라봐 주고, 내게 안아달라 손을 내밀 때에는 있는 힘껏 안아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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