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매 Sep 24. 2022

[나의 파라다이스] 팍팍한 시골살이

02. 눈 뜨고 코 베이는 시골




시골눈을 뜨고 코를 베일  있다. 어릴  공무원이 하는 일은 ‘도장을 찍는 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일이 ‘도장파기였다. 막도장이 아니라 정말 서류에 들어갈 나의 소중한 도장은 당연히 온라인에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긴장감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말을  옆자리 직원이 시장 쪽에 가면 괜찮은 잡화점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나를 데리고 직접 가는  아닌가. 그곳에서 이름  자를 밝히고 도장 디자인도 고른  금액을 물어보니 무려 삼만원이었다. 인터넷에서 천원부터 시작하는 도장은 한정적인 디자인에 이름  자도  들어가지 못하는 엉성한 주제에 무지막지하게 비쌌다. 그때야 나는 시골이라고 모든 물가가 저렴하며 정이 오가는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인터넷으로 진작 도장을 맞췄다면 이렇게 돈이 뜯길 일도 없었을 거라며 사무실로 복귀해 꽤나 배가 아팠던 기억이 있다. 고작 신입 공무원의 월급은 100만원 ~중반으로 그리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서 삼만원이 도장에 뜨꼈으니  속이 쓰렸다.  후로는 무언가를 구매할 일이 있으면 악착같이 인터넷으로 찾아보거나 가격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코가 베이고 나니 눈을 뜨는 사람이  셈이었다.


29살, 20대의 끝을 앞둔 채 시골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근무하는 곳이 아주 오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것들이 더러 있었다. 이를 테면 내가 떡볶이를 사러 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줄줄이 만나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게다가 ‘혼밥’이 아무렇지 않던 나에게 이곳에서의 ‘혼밥’은 제법 큰일이었다.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혼자 두면 안 된다는 인정이 뒤섞인 분위기에 익숙해진 지금에는 바나나가 들어간 쉐이크 음료나 샌드위치처럼 간단히 홀로 밥을 떼우는 게 아무렇지 않지만 신규 때는 혼자 밥을 먹게 되는 일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여러 사람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보다 산책과 사색을 좋아하고 딱히 음식에 대한 집착도 없는 나에게 이런 풍경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 대략 1년쯤 걸렸다. 심호흡 두 번 정도를 하고 생각해보면 자신들의 익숙한 공간에 완벽한 타인이던 ‘나’의 등장에 그들도 긴장을 하고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게 아닐까 싶다. - 이렇게 합리화하지 않으면 이 생활을 견디긴 어려웠을 거다.


어떻게든 ‘직장인 되었다. 그렇게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무수한 합리화와 절박한 친절함이 범벅된 하루를 보내던 내가 어느날 사무실에서 울어버렸다. 이건 눈을 뜨고 코가 베여서가 아니었다. 실제 객관적으로 혼자가 되었을 , 고독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신입의 절규였다. 공무원의 인수인계는 악명이 높다. 전임자를 욕하기엔 나도 언제가  전임자가 된다. 앙에서 떨어뜨리는 업무를 광역단체에서    쪼개어 내린다고 한들 자그마한 지자체에선 이를 소화해낼 인력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인수인계는커녕 ‘안녕조차 고하지 못하고 떠나는 일도 부지기수다. - 공무원이 되기 전까지 이 직업의 주된 업무는 서류발급이 대부분 차지한다고 생각한 내가 처음으로 큰코를 다친 셈이었다.


직장에는 아픈 사람도  았다. 처음에는 꾀병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지병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있었고 직업병도 존재했다. 그렇게 여러 이유로 함께 일하던 분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혼자가  적이 있었다. 관리자인 과장님이 직접 나서 도와줄 정도로 답이 없던 시기였다. 사람들의 앞에서 보통  웃지만  울진 않는데 그날은 유독 눈물이 났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일단 해보라고 하며 다그치는 사람이 있었다. ‘일단 해본다라니. ‘일단  알아야 ‘일단이다. 해보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 모든 행동에 시간이 걸리는데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존심으로 꾹꾹 참아내던 눈물이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나오자 그제야 주변에서 하나둘 도와주었다. 나는 울면서 뭔지도 모르는 인건비 서류에 도장을 꽝꽝 찍어가며 허겁지겁 옆에서 설명을 해주는 다른  직원의 위로를 받았다.  뒤로는 다신 울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 것도 내가 무언가 도움을   있을 때야 마음이 편했다. 물론 힘든 시기에 받은 모든 도움기억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때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만큼 고독한 신규는 마음을  곳을 찾고 있었나 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적은 글로 다른 분들과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파라다이스] 꿈은 서울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