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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꿈별 Oct 21. 2021

15. 서평은 책 도장이다

나는 도장을 새기고 찍고 다시 새기는 사람

센트럴시티의 서점 옆에는 동그라미, 사각형 여러 가지 틀에 고무도장을 새겨주는 곳이 있었다. 도장보다는 스탬프라고 불러야 하나. 나는 여기서 책 도장을 만들고 지나갈 때마다 들여다보곤 했다.    

  

두 아이에게는 ‘날마다 꿈꾸다’라는 글이 있는 도장을, 둘째는 자신이 선택한 대로 글 없이 자기 이름만 크게 자리한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 아이들의 책 속표지에 찍어주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다시 가서 정사각형 틀의 빨간 기둥 스탬프를 골랐다. 두 아이의 이름을 이어 ‘김 0000 책’이라고 새겼다. 책 선물을 줄 때 속표지에 도장이 찍히고,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책에도 날을 잡아 도장 찍기를 시작했다.     

 

나의 독서교실 수업 활동지에도 말도 안 되게 귀여운 얼굴로 정신없이 읽고 있는 소녀 옆에 ‘해피샘 000’이라 찍힌 도장을 담대히 찍어주곤 했다. 아이들은 도장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헐, 이렇게 예쁘다고? 너무하시네’하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도장 찍기를 계속했다.      


서평은 책 도장이다. 손잡이 꼭대기에 내 스케치가 플라스틱 커버를 쓴 채 보인다. 커버 안 글과 이미지를 만일 한 권의 책 표지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구상하고 선택해 설명도 곁들이며 그려준 후 잠시 기다리는 동안 기계로 새기고 비로소 흰 종이에 찍힌 결과물이 바로 서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권의 책은 독자라는 무수한 기둥 중 특별히 ‘나’라는 손잡이 기둥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모양으로 찍힌다. 다시 가게 앞을 지나칠 때면 그 옆에 있던 스탬프 틀이 또 갖고 싶었던 적이 많다. 두 번째도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면 또 하나의 개성 있는 서평이 나올 것이다.      


한 권의 책에 접근하는 질문 또한 여러 모양을 지닌다. 독서지도의 발문과 독서치료의 발문, 책놀이 발문, 디베이트의 논제와 비경쟁 독서토론의 논제는 형식도 목표도 다르다. 하지만 이것만 옳소, 저것은 틀렸소 할 수 있을까.      


서평을 한 번 쓰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의 초기 서평, 말하자면 3등분 했을 때의 전반 300편가량을 다시 쓴다면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글을 잘 쓰게 돼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마음에 내장된 앨범 수의 변화 때문이다. 

시간과 체력을 비축해 다시 쓰고 싶은 ‘목에 가시 같은 서평들’이 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두 번 쓴 서평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시간은 밤』이다. 전자는 두 번째 서평이, 후자는 첫 번째 서평이 마음에 든다.      


나는 두 번째 서평을 쓰고 싶다. 

완독 스케치는 그런 두 번째 서평을 쓰고 싶다는 의지와의 타협이기도 하다. 

시처럼, 노래처럼, 한 장면만으로 또는 극과 극의 시점으로, 점과 선처럼 간략하게, 『백년의 고독』에서 남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향해 페르난다가 자신의 진심, 그 속내를 쏟아놓던 장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한 문장처럼 비장하고 길게도 다시 써보고 싶다. 

서평의 존재 이유, 가치, 목표에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아니 그쯤 되면 서평이라는 말을 빼고 에세이나 감상문으로 달리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그 서평>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문학동네/조재룡 옮김/20201103

- 아흔아홉 개의 놀이모든 시도는 가능하다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문학동네』은 연주회에서 들었던 바흐의 “푸가”가 주요 집필 동기로 작용해 1947년 초판 발행 후 음악, 연극, 시청각 자료 등 다양하게 변신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대표작이다.(152p) 대중뿐 아니라 명사들의 찬사 또한 이어지며 ‘전무후무한 글쓰기’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독특한 타이포그래피로 저자와 제목이 단순하게 표지를 채우는데 반해 띠지는 시선을 사로잡는다. 1928년에 찍은 레몽 크노의 연속사진이라는 설명을 본 후, 그보다는 뒤쪽의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는 인용문이 ‘당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격려로 다가오면서 용감하게 책장을 넘긴다.      


“문체 연습”은 본문과 해제가 거의 동일한 분량을 차지한다. 그만큼 해제가 탄탄하게 실려있다. 늘 차례를 주의 깊게 보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급한 마음에 첫 번째 글 “약기”부터 읽기 시작했다. 세네 편이 넘어가니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각주가 없음에 불안해하며 사전을 찾아 빈 공간에 용어설명을 적어 넣다 보니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렇게 읽던 도중에 해제를 발견했다. 이제 치밀한 해제가 있으니 안심하고 읽어나가도 된다.      


기시감은 “스토리텔링 연습(매트 매든/클라우드 나인)” 때문이었다. 몇 해 전에 읽고 이렇게 매력적인 책이 있다니 감탄하면서 중학생 친구들 논술에 활용했었다. 친구들아, 마법 같지 않니? 제목을 줄 테니 내용을 각자 만들어보자. 여덟 컷 만화 형식이라 그림이 많잖아? 하며 함께 탁월한 발상과 표현을 신기해했었다. 다시 펴보니 “이 책은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에서 영감을 받았다.(스토리텔링 연습, 4p)”는 문장에 밑줄을 치며 아, 레몽 크노라는 훌륭한 분이 계셨었구나 하고는 지나간 것이 기억난다.     

 

“스토리텔링 연습”에서는 조작되지 않은 기준점이 되는 버전을 ‘템플릿’이라 지정하고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기준 글을 찾아야 한다 생각했고 당연히 첫 글 “약기”라 여겼다. 해제를 보니 반은 맞았다. “약기”와 더불어 “객관적 이야기”가 토대 이야기이자 저본이라 밝히고 있다.(183p) 토대 글을 가지고 주어진 각 제목에 최대한 근접하게 써보고 작가의 글과 비교하는 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고 시도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속출했다. 일단 주어진 글을 이해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계속 도전할 수는 있겠다.      


‘뒤가 사라졌다’, ‘고유명사’, ‘고문 투로’, ‘집합론’, ‘수학적으로’ 등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웃음을 참으며 읽어야 하는 때도 있다. 낭독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번역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역자의 주관적 해석이 많은 부분 스며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내내 들었는데 해제에서 궁금증은 대부분 풀린다. 원제와 원제의 의미, 번역어 선택 이유뿐 아니라 번역의 의도와 착안, 진행방식까지 보여준다. 게다가 특별한 주제는 특별한 전문가의 검증도 있었기에 신뢰를 더한다. 어쩔 수 없이 원어로 읽을 독자가 마냥 부러웠다. 그래도 가장 즐겁게 읽은 곳은 역자 후기 격인 ‘번역가와 편집자’였다. “문체 연습”의 어투를 살려 ‘피, 땀, 눈물, 으쓱함’ 가득한 ‘번역의 시간’, 몰입의 지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 책을 한 번 본 후 과연 ‘다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저 계속되는 질문, 해야 할 연습에 내내 적응해 나가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렇게 한 번을 살펴보고 나니 띠지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음악으로 접한 변주의 힌트를 그는 글은 물론이고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떨지 말고 이렇게 해봐’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크노가 펼쳐 낸 저 소박하고 수공업적이며 재미난’ 아흔아홉 개의 놀이가 문체 연습에 바글거린다.(159p)” 유일한 정답은 없고 모든 시도는 가능하다. 아마도 뜻밖에 만난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을 오래도록 아끼고 사랑하게 될 것 같다.


      



서평 8년 차 시점>            


-작년, 한 북카페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으로 문체 연습을 했었다. 우와, 너무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두 권의 책으로 하는 이벤트!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중 ‘크림’ 중에서)---


이 문장을 다른 문체로 한 나의 도전!! 5등 했습니아~~ 편집장님의 근사한 평까지 하루 종일 신났습니다아~~!! 감사합니다.    

 

시고 버전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시죠. 설명이 안 되시고 이치에도 맞지 않으시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뜨리시는 사건이시죠.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마시고, 고민도 하지 마시고, 그저 눈을 감으시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으실까요.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 나가실 때처럼.     


동요(문체혁명 83쪽 버전)

우리인생 가끔그래

설명불가 이치없지

마음얼얼 싱숭생숭

그럴때는 이리해라

생각말고 고민말고

눈을감고 흘려보네

저큰파도 밑에숨어     


라틴어로 서툴게 끝맺기(문체혁명108쪽 버전)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누스.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누리움,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트라.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뒤우스, 고민도 하지 말고리움,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무스.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트라  

   

햄스터 버전(복실체)

주인아, 족보 있는 골든 햄스터인 나 복실이에게(사실 족보 없음-주인 각주)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예를 들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프라이 흰자, 달달한 애플파이, 치즈를 살짝 묻힌 부드러운 빵, 혼신의 힘을 다해 껍질 다 벗겨둔 알밤 등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케이지 네 귀퉁이에 쌓아 놓았는데(이걸 ‘저장’ 또는 ‘비축’이라고 불러.)! 

주인, 니가 깔끔한 척 아무 예고도 없이 집을 갈아버려! 

긴 겨울을 위해 준비한 식량을 똥과 섞어 버려 버려! 

아아,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속으로 이해는 하지만 참기는 힘들구나. 키우고 싶거든 공부부터 좀 해라)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한 번만 더 용서해 준다. 두고 본다!)     


덧> 장모 골든 햄스터 복실이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 한 편과 멋들어진 복실체 문장으로 생의 흔적을 남기고 수술 끝에 사망했다. 우리 가족은 가족이었고 가족인 복실이를 지금도 기억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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