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하면 통한다
서평 기간, 연차가 쌓여도 서평 후 증후군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독서실에 박혀서 서평을 씀에도 아쉬움과 자책을 남긴다. ‘내가 왜 그랬을까’로 시작하는 아쉬움은 ‘이것이 아니라 저 지점이 더 중요했다. 그것을 쓰려고 했는데···왜 그랬을까?’ 모든 지시어가 동원된다. 놓쳤다, 빠뜨렸다, 잘못 생각했다, 이 부분이 어색하다, 반도 못 담았다, 약하다, 과하다···와 같은 ‘괴로운 읊조림의 늪’에 빠지는 것이 서평 후 증후군이다. 물론 내가 이름 붙였기에 이런 진단명을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서평 7년 차 때 궁하면 통한다고 반짝 떠오른 자구책이 ‘완독 스케치’다. 엄밀히 말하면 스케치보다는 크로키에 가깝다. 브레인스토밍 기법과 유사한 면이 있고 자기 검열을 최소화하면서 순간적 인상을 기록할 수 있다. 독서의 완성인 서평을 마쳤음에도 이렇게 완성될 수는 없다, 우리 헤어질 수 없어요 싶을 때 활용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때 그 서평>
① [서평]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 문학동네/송병선 옮김
- 어리석고 아름다운 인생 여정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문학동네/송병선 옮김)”을 키로가와 카프펜티에르 다음으로 읽게 되었다. 연이은 독서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시·공간적 배경지식의 단편성이었다. 전공자들을 부러워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마치 무티스를 읽기 위해 앞의 두 작가를 읽어온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은 결코 잊지 못할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알바로 무티스는 마크롤에 관한 일곱 편의 소설을 펴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세 편을 묶었음을 해설에서 밝히고 있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마크롤 가비에로의 여정은 알바로 무티스의 삶은 물론 그의 또 다른 작품을 알고 싶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무티스는 콜롬비아 작가지만 국제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514p)" 작가의 세계관은 ‘과거 어떤 시간’, ‘먼 어떤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끊임없이 현실을 비추게 한다.
작가가 첫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기도 한 “제독의 눈”은 가비에로의 일기를 담고 있다. 가비에로의 상처를 치료하며 함께 기거하게 되었던 플로르 에스테베스의 가게 ‘제독의 눈’에서부터 일정은 시작된다. 밀림 끝 제재소에서 목재를 구입해 큰 강가에 짓고 있는 군부대에 높은 가격에 판다는 사업이다. “이 배에 오르면서 나는 제재소에 관해 물었지만, 아무도 그것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못했다. 심지어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28p)" 처음부터 불안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된 이런 결정을 비롯해서, 내 인생의 역사를 이루는 이런 막다른 길과 재앙이 왜 자꾸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지 몹시 궁금하다.(29p)" 가능성 있는 수단을 통해 부를 소유하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은 가비에로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지금껏 한 번도 원하는 결과를 내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항상 배신당한 채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늘 완전히 패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끝났다. 그런 끊임없는 패배를 바라지 않았더라면, 내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29p)"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의심했을 때 왜 멈추지 않았을까, 스스로 ‘패배하고 싶다’는 모순에 빠지는 데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성공했으리라는 진단까지 하면서 왜 돌이키지 않았을까. 어리석어 보이는 한편으로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이어지는 다른 두 편의 연대기에서도 우연하면서도 정확히 겹쳐지는 패턴의 불행한 반복은 하나의 축을 이룬다. 제재소를 향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밀림을 통과하며 어지러운 꿈을 꾸고, 여러 형태의 죽음을 보고, 자신 또한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록을 남긴다.
가비에로가 제재소를 향해 가며 겪는 일들은 카프카의 ‘성’에 등장하는 토지 측량사 K의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을 연상시킨다.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암시는 계속되고, 모호한 실체를 향하는 걸음은 꺼림칙함을 더한다. 제재소 역시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내가 이 제재소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해달라고 졸랐을 때, 선장과 소령, 그리고 제재소에 관해 말했던 사람들이 왜 말을 아끼고 피하려고 했는지 이해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127P)" "말”에 대해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어 정의하는 문장들, 위험, 밀림, 꿈에 대한 문장들은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제재소는 반드시 닿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모든 꿈, 욕망, 신기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도 위험하고 불가사의한 계획으로 애쓸수록 탈출구 없이 깊이 가라앉게 만드는 늪처럼 그려진다.
자연은 물이나 강, 열대성 기후나 숨쉬기 어려운 고지대와 추락할 듯한 산비탈 벼랑 등 여러 모양을 한 장애물로 앞을 막아선다. ‘몰랐어요’가 통하지 않는 인생의 함정들 앞에서 가비에로와 플로르 에스테베스, 일로나, 암파로 마리아를 비롯한 인물들이 당면하고 선택하는 삶을 그려낸다. 읽다가 멈추어 생각하게 되는 정밀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마치 명언집 같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깨달을 뿐 취하지 못하는 인간 한계를 가식 없이 보여줄 때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흘러넘쳐 경종을 울린다. 같은 실수의 반복이 삶이라면 성장은 불가능한 것일까 자꾸 생각나게 될 것이다. 인생 명작 한 권을 더한다.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알바로 무티스/문학동네] 완독 스케치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들, 완독 감상입니다.
사실, 리뷰에 잘 녹여서 써야 하는데 늘 편중된 서평을 전전긍긍 쓰고 던지는 행동의 반복이라 언급조차 못했던 질문이나 감상이 나중에 떠오르곤 합니다. ^^
1. 필사하고 암기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 연필 줄이 양면 가득일 때 난감해지곤 했습니다. 필사해 둔다면 넉넉히 핸드메이드 명언집이 될 듯하지만 체력 고갈로···도전은 못하네요.
2. 문동판에 묶이지 않은 가비에로의 남은 이야기 네 편 다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3. 무티스의 친구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주문, 도착했는데(중남미 문학작품 중 읽고 넘어가야 할 작품인지라, 게다가 기회가 기회인지라...) "거지소녀" 먼저 읽고 와야겠지요.
4. 특히 ‘제독의 눈’에서 내내 연상되던 카프카의 ‘성’ 다시 읽기(저는 '성'을 읽으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순간에 느꼈던 기분이 여전히 생생히 기억납니다. 아주 오래전이었는데도요.)
5. 두 번째 수록작 ‘비와 함께 오는 일로나’ - 이렇게 감상적인 제목을 짓다니···제목처럼 아련함이 남는 작품이네요. 라리사가 들려주는 ‘음울한 이야기’ 속에서 한 세기 반이 지난 과거 일을 현재라고 하는 인물들과의 만남, 과거가 절대적인 현재로 바뀌었다는 경험담이 '마술적 사실주의'에 예일까요?
6. 마크롤 가비에로의 동선을 따라가는 여행은 가능할까? 어떨지 궁금합니다. 만약 여행 패키지로 나온다면 신청자가 얼마나 있을까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결코 엄두가 나지는 않네요.
7. 강에서 밀림에서 고지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 반복해 읽던 책- 나에게 그런 책은 무엇이어야 할까?
등등을 생각했습니다. 아마 더 생각이 나겠지만요~^^
--댓 반응; 리뷰보다 쉬운 느낌이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장점이 있어요/요렇게 정리해주셔도 머리에 쏙 들어오네요, 찜
②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문학동네] 완독 스케치(20210320)
오만과 편견을 떠나보내기 전 짧은 스케치로 이별의식을!
1. 베넷 부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소동극들을 떠올린다.
2. 원작이 서간체 소설 ‘첫인상’이었듯이 작품 속 등장하는 편지들이 주의를 집중시키고 결정적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인상 깊다. 편지를 기다리고 건네받고 펴보고 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아름답다.
3. 결혼을 수식하는 표현들-그토록 부적절한 결혼(p.166), 돈이 목적인 결혼, 분별 있는 결혼(p.202), 이토록 안 맞는 결혼(p.302), 아주 유리한 결혼
4.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비현실적일 만큼 살갑고 동화적인 자매관계가 놀랍기도 부럽기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기도 하다.
5. 제인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엇이 인풋 되어도 아웃풋은 인류평화! 천사표 날개가 달린다.]
6. 피아노 연주, 노래, 무도회... 전쟁과 평화가 생각난다. 1864년부터 1869년 완성한 전평, 오만과 편견 1813년 비슷한 것인가? (p.71)
7. 성격을 설명하는 문장들
8. 더 이상 절친일 수 없는 친구 샬럿-엘리자베스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친구와 함께 나누었던 편안한 친밀감이 끝났음을 느꼈다.(p.194)- 가장 믿는 사람, 가까운 사람의 상상 못 했던 행동들- 뒤통수를 조심하기 위해 어느 선까지 예상하고 대비해야 하나
9. 엘리자베스의 시원한 말들에 엔도르핀이 나온다. 때론 말을 너무 잘해서 어디서 훈련받고 온 것이지 싶다. 몹시 부럽다
-“다아시 씨, 당신의 발언 방식이 제게 뜻밖의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좀 더 신사적으로 행동하셨다면, 거절하며 제가 느낄 꺼림칙함이 남을 뿐 영향이랄 게 없죠.(p.250)”
10. 숲을 따라 난 길에 숨겨진 멋진 길, 가장 좋아하는 산책로
11. 개인과 가족,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개인, 각각이 너무도 다를 수 있는, 위로일 수도 상처일 수도 있는 가족의 존재(p.269)
12. 3부 다아시의 집인 더비셔의 펨벌리 저택을 그린 장면이 특히 근사하다. 다채로운 정원과 숲, 언덕, 정원, 개울, 계곡, 산책길, 다리, 오솔길... 영화를 꼭 보고 싶은 이유다.
13. 기억할 것- 제인 오스틴 특유의 서술 기법인 '아이러니 수법'-화자 자신이 말한 직접적인 발언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담아내는 것으로 책 속에서 직, 간접적으로 활용(p.497 해설)
14. [제인 에어]를 마치고 이어서 읽었다는 타이밍도 좋았다. 봄인 것도 좋았고.
15. 엘리자베스 베넷과 피츠윌리엄 다아시를 드디어 만나다.
16. 그럼 이만
서평 8년 차 시점>
완독 스케치를 많이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 역시 적지 않은 에너지가 들어감을 부정할 수 없다. ‘쉽게, 즐겁게, 편하게’라는 지침을 세우고 가볍게 시도했지만 점점 ‘제2의 서평’으로 검열의 자를 꺼내 들었다. 처음 목표는 ‘아무 말 대잔치’였다. 그렇다면 다음 독서 후에는 ‘기본’을 지켜 취지에 맞는 완독 스케치를 그려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