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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 꿈별 Oct 21. 2021

14. 문제의식이 없는 게 문제야

비평하라

나민애는 『책읽고 글쓰기』에서 ‘좋은 서평러가 되기 위한 체력 운동법’ 다섯 가지를 말하는데 그중 두 번째 항목은 내가 명심할 사항이다. “심리적으로 쫄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이 대단한 책에 코멘트를 단단 말인가’이런 생각은 접어둔다.”(p.77) 내 맘을 어찌 아셨을까 들켰구나 싶었다. 이 거장의 작품을 비평한다, 내가? 하는 생각은 ‘좋은 서평러’로의 여정에 걸림돌이 된다. 07. 「때론 딜레마에 빠지고」편에서 다룬 이야기 같지만 그때는 매너리즘에 빠진 듯 패턴화 된 서평을 주로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비평 미약 또는 불능’이 초점이다.    

  

‘좋은 서평러’의 두 번째 걸림돌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초기 서평단 활동일 것이고 마지막으로 불화하지 말자는 성격도 가세한다. 하지만 『서평 쓰는 법』에서 이원석도 “요약 없는 서평은 맹목적이고 평가 없는 서평은 공허하다”고 강조하지 않나! 무늬만 서평에서 서평다운 서평으로 좋아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시도해야 한다.  




그때 그 서평>


 [서평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펭귄클래식코리아 

-영혼의 산림욕불멸하는 고전의 힘 (20200506)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2019,펭귄클래식코리아,옮긴이 홍지수/1854)은 가장 유명한 고전 수필집 중 한 권으로 내게는 여전히 읽어야 할 도서목록을 차지하는 작품이었다. 저자가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2년 2개월 남짓 동안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근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홀로 산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나의 여생은 지금까지 내가 시도해 본 적 없는 실험이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보았다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16쪽)’ 소로는 자신만의 삶을 살고 기록하고 시간을 건너와 현대의 독자, 환경오염과 바이러스 창궐의 시대를 사는 현대의 독자에게 말을 건넨다. ‘생활의 경제’부터 ‘봄’을 끝으로 맺음말까지 열일곱 편의 이야기는 솔직하고 구체적인 묘사로 생동감 넘치는 숲 속 생활을 보여준다.    

  

줄을 치느라 멈추는 수많은 지점, 필사하거나 암송하고 싶은 아름다운 문장, 친구들의 의견을 묻고 싶은 독특한 논리, 그 자체로 음악이고 문학이고 시인 자연의 경이로움 등 ‘월든’ 읽기는 영혼의 산림욕이자 힐링 그 자체였다. 활자가 노을의 색으로 새의 지저귐으로 알싸한 손끝의 추위와 모닥불의 온기로 매 순간 마법을 일으킨다. 무엇 하나 대충 지나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하고 자신의 사유를 세밀하게 덧붙힘으로 숲 속 오솔길에서, 오두막에서 독자 또한 생각하고 느끼는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직접 철광을 캐내어 녹이고 필요한 서적을 읽고 스스로 방법을 습득해서 잭나이프를 만드는 소년과, 교육기관에서 야금학 강의를 듣고 아버지에게 로저스의 주머니칼을 얻은 소년이 있다고 하자. 결국엔 두 소년 중 누가 손가락을 베일 것인가? 나는 졸업할 때 내가 항해학을 수강했다는 통보를 받고 놀랐다. 아마 항구를 한 번 둘러봤으면 항해에 대해 더 많이 배웠으리라. 학교에서는 가난한 학생조차도 정치 경제학만 배우고 철학과 다름없는 생활의 경제는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 결과 학생이 학교에서 애덤 스미스, 리카도, 세의 저서를 읽는 동안 그의 아버지는 빚더미에 올라앉는다.(61쪽)’ 때론 현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때론 웃음기 베인 유머를 보여준다. 독자는 공감하기도 질문하기도 하며 다시 한번 귀 기울인다.      


고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전이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사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고전이야말로 쇠락하지 않은 유일한 예언자요, 델포이나 도도나가 결코 제시한 적 없는, 가장 최근에 떠오른 의문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다. 고전을 멀리하는 것은 자연의 역사가 유구하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116쪽)’ 또한 ‘문학은 최고의 유물이다. 문학은 그 어떤 형태의 예술보다도 우리와 친근한 동시에 보편적이며, 삶 자체에 가장 근접한 예술이다.(117쪽)’ 그가 내리는 정의는 무척이나 명확하고 설득력 있다.     


만병통치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특히 요즘 같은 시기라면 더욱!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의 만병통치약은, 길고 얕은 검은색 범선처럼 보이는 마차를 끌고 다니는 장사꾼이 아케론과 사해의 물을 섞어 약병에 담아 파는 물약이 아니라, 무엇과도 섞이지 않은 신선한 아침 공기다. 아침 공기! 아침 시간의 처방전을 잃어버려 하루의 수원인 아침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을 위해 우리는 아침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하리라. 그러나 명심하라. 가장 서늘한 지하실에 저장한다 해도 아침은 채 정오까지도 남아 있지 않으며 정오가 되기 훨씬 전에 이미 병마개를 열고 새벽의 여신 아우로라의 자취를 따라 서쪽으로 가고 있으리라.(155쪽)’ 아니, 이렇게 근사할 수가....게다가 위와 같은 문장이 차고도 넘친다. 이런 식의 발췌는 끝이 없으니 이쯤 해야겠다. 낱말과 문장이 유려하게 펼쳐지고 그 안에 ‘저요!’ 손들고 싶어지는 논리와 초대도 이어진다. 책의 뒤편에 옮긴이 주를 충실히 담아 살피면서 이해를 높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시민 불복종’도 곁들여 소장하고 종종 펼쳐보려 한다. 21세기에 더 빛날 아름다운 고전이다.      


② [서평엠마뉘엘 카레르의 러시아 소설』 열린책들/임호경 옮김

거대한 애도의 서진혼곡 또는 자장가(20210903)   

  

엠마뉘엘 카레르의『러시아 소설(열린책들/임호경 옮김)』은『적(敵)』(2000)에 이은 그의 두 번째 르포르타주다.(출판사 소개 인용)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7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작품으로 그는 도입부에서 직접 그 의미를 전한다. “『적(敵)』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나는 7년 동안 갇혀 있었고, 탈진하여 빠져나왔다. 나는 생각했다. 이젠 끝났어. 이제 난 다른 것으로 넘어갈 테야. 난 바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삶으로 가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르포르타주를 쓰는 것이 좋겠어.”(p.17) 『러시아 소설』은 그가 사람들과 삶의 편으로 옮겨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작가는 도전하듯 여정을 시작한다.     


그가 취재할 헝가리 남자는 2차 대전 말 러시아 오지 코텔니치의 정신병원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잊힌 채 53년을 보낸 사람이다. 이름도 언어도 불명확한 ‘안드라시 토머’의 귀환은 상징적 사건이 된다. 전쟁으로 실종된 8만 명 이상의 헝가리 병사들, 56년이 지나서 그중 한 명이 생환한 것이다. ‘인수자가 인수해 가지 않은 소포처럼’(p.29) 남은 채 ‘가차 없는 파괴의 과정’(p.39)을 거친 그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은 또 하나의 ‘실종’, 이번에는 귀환하지 않았을뿐더러 더 이상 타인이라 할 수도 없는 외조부의 그것과 겹친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은 사망한 것으로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종자는 일종의 유령, 여러 세대를 감염시킬 수 있는 정체 모를 고통의 근원인 반면, 사망자는 장례를 치르고 애도할 수 있고, 마침내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p.63) ‘선언’이 사람을 사망케 한다. “사망 선언이 내려지자, 그는 죽은 것이다.”(p.64)     


이민자였던 카레르의 외조부 조르주 주라비슈빌리는 집에 있던 어느 날, 십 대였던 어머니와 외삼촌 앞에서 체포된다. 그들은 다시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프랑스의 정치 역사학자이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인 헬렌 카레르 드카소세가 실종된 주라비슈빌리의 딸이자 카레르의 어머니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어떤 시간을 겪어온 것일까. 어머니가 평생 모토로 삼았던 “절대 불평하지 말고 절대 설명하지 말라”의 무게는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사라진 존재가 살아남아 성취한 자들을 위협할 수 있기에 숨죽였던 시간은, 글로도 말로도 드러내지 말 것을 압박하지만 이 무언의 강제를 작가는 거부한다. “난 그녀가 죽기 전에 이것을 쓰고 또 출판하리라. 바로 그녀를 위해 쓰리라. 그녀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단지 나만이 아니라 그녀를 말이다.”(p.131) 이 책의 목적이다. 그는 다시 러시아로 향하고 외조부의 편지를 살피고 기억 저편을 기록한다.     

코텔니치 방문은 작가의 러시아적 뿌리를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랑스러운 유산인 ‘고운 러시아어’가 유창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아냐, ‘프랑스 사람들과 프랑스어로 얘기할 수 있게 되어 좋아 미칠 지경’(p.47)인 그녀, 영혼으로 노래 부르며 환하게 웃던 그녀는 다음 방문 때는 FSB의 중령 사샤 카모르킨과 함께고 그들 사이에는 이제 어린 아들도 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카레르와 촬영팀을 아이처럼 환대하던 그녀에게서 작가는 더 이상 코텔니치의 마타하리를 발견할 수 없다. 통역을 도울 수 있어 기뻤던 아냐는 소년원을 촬영하던 날 냉랭한 카레르의 눈치를 살피고 그날의 불편함은 가슴에 맺힌다. 그녀는 사샤의 사랑이 시들해지고 너무나 좋아했던 프랑스어도 자신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낀다. 카레르는 파리로 떠나기 전, 역 앞 광장 벤치에서 카메라를 고정한 채 피사체를 담는 실험을 한다. 이 특별한 기록의 마지막은 아냐와 어린 레옹, 그리고 아이에게 불러주는 카레르의 러시아 자장가로 채워진다.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노파 살해를 연상시키는 참혹한 장면에 앞서 미리 이루어진 애도인 셈이다.     


작품을 이끄는 두 번째 축은 작가와 소피의 사랑이다. 작가는 이 사랑을 구원삼아 ‘다른 것’, ‘바깥’, ‘삶’으로 건너가기를 원한다. 사랑은 넘쳐나나 극한 갈등을 동반하고 소피는 단테의 베아트리스가 아닌 열정과 투쟁의 대상이 된다. 책 속의 책과 같은 르 몽드 개제 단편은 소피에게 바치는 애가이자 긴 청혼의 서(書)로 읽힐 수 있을까. 기계장치의 설계자처럼 모든 것을 기획하고 완벽한 결말을 자신했건만 예상했던 승리는 맛볼 수 없다. 다툼과 불신과 사디즘적 강박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더해 가족들의 시선과 차가운 여론, 비웃음까지. 5부의 311페이지부터는 소피의 변론이 나온다. 소피 입장에서의 총괄 정리 편인데 카레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소피의 시점으로 복기한다. 여성의 심리를 작가가 이토록 예리하게 통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종말로 치닫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일종의 죽음이다. ‘자잘한 다이아몬드들로 둘러싸인 에메랄드가 박힌 백금 반지’(p.407), 『적』의 장클로드 로망의 반지로 마감하는 장면은 으스스하고도 필연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러시아 소설』은 일기이며 고백록 또는 자전적 소설이다. 카레르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시간을 투영시킨 그의 작품들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3대를 넘어 4대를 향하는 큰 폭의 가계도를 펼쳐 흐릿한 부분을 수정하고 선명한 마침표를 찍는 과정이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의 다층적인 감정을 캐내서 면밀히 분석한 보고서다. 그의 문장은 이성을 벼리게 하고 감성을 충만케 한다. 예측과 계산이 가능한 합리주의는 르몽드지의 단편 에피소드에서 정점을 보여준다.『러시아 소설』은 죽은 자 들과 남은 자들을 글과 영상으로 담아낸 여정이다. 안드라시 토머부터 냐냐, 그리고 아냐까지, 이들을 불러낼 무대를 설치하고 커튼콜의 기회를 선사한다. 그들을 위해 진혼곡 대신 자장가를 부른다. 이제 비로소 살아있는 또는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 또는 잃어버린 자들과 화해하고 그들이 출몰하던 죄책감과 고통의 국경선을 넘어 삶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진정한 휴식과 자유는 이제부터다.     


강제에 의해 사라지고 죽음을 선고받는 사람들은 영하 25도의 코텔니치까지 가지 않더라도 떠올릴 수 있다.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는 자들, 곁에 있으나 스스로를 가두고 유폐시키는 자들,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숨바꼭질하는 자들 등 우리 곁에 있는 여러 명의 안드라시 토머를 떠올린다. 모멸감으로 스스로 투명인간이기를 선택했든, 보도 듣도 못한 팬데믹이 벼랑 끝으로 밀어냈든 안드라시 토머들은 그 수를 더한다.『러시아 소설』은 책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선다.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자기만의 고통을 끌어내 직시하고 견주게 만들고 마침내 위로한다. 쓸쓸하고 먹먹한 여운이 편치 않을지언정 카레르를 만나는 시간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어머니도 알잖아요. 만일 이야기하는 게 금지된 뭔가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뿐이라는 것을요.(p.330)

-이상한 일이지만, 이 책을 쓰면서 난 그 잊을 수 없는 느낌을 다시 느꼈답니다. 엄마에게로 헤엄쳐 가는 느낌, 엄마에게 닿기 위해 풀장을 건너는 느낌 말이에요.(p.419)     





 서평 8년 차 시점>     

요즘에 와서 감정을 내려놓을 것, 흥분하지 말 것, 과몰입하지 말 것을 되뇐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악령』을 읽을 때 만일 "얄미움" 하나만으로 인간을 만들면 뾰뜨르 스쩨빠노비치가 될 것이라며 페이지의 밑줄 옆에 굳이 –얄미운 녀석, 이를 악물고 책을 읽는다-따위를 적어 넣는 나! 쥐어 때리고 싶고, 혈압 오른다고 토로하며 스타브로긴을 향한 시선을 방해한다, 내내 투덜거리던 나! 이러지 말라는 말이다. 옳지 않다.      

『월든』 서평은 글쓰기 동아리 모임에서 나눴다. 그때 한 회원이 했던 “다 좋다고 하셨는데 뭐 나쁜 건 없어요? 다 좋기만 한가요?”라는 말은 모임이 끝나고도 계속 귓전을 맴돌았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러시아 소설』은 최근의 서평이다. 사람은 배워야 산다고 서평 심화과정을 알게 되어 격주로 세 편의 서평을 합평하고 첨삭받는 기회를 처음으로 가졌다. 『러시아 소설』 서평은 그때 세 번째로 나눴던 카레르 서평으로 이에 대해 한 분이 하셨던 말씀도 『월든』에서의 지적과 유사했다. ‘샘의 서평을 읽으면 잊었던 첫사랑을 만나는 느낌이 든다. 책을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렇게 항상 작가의 편, 등장인물의 편을 들 수 있는지 너무 한결같이 편들어준다.’      


이것은 칭찬일까? 진심이 훅 끼쳐오던 이 말은? 요즘 많이 쓰는 말로 ‘반반’이다. 

아니, ‘문제의식이 없다’는 말의 온건한 표현인 새겨야 하는 일침이다. 

이해는 했다. 이해를 반영해 다른 결과를 내느냐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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