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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Jun 18. 2024

웃음소리

다시 직장에 나가는 첫날 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작년에 복직하면서 이 출근길에 얼마나 매료되었던가. 그런데 올해는 그때의 벚꽃도 튤립도 하나 눈에 들지 않았다.

저 길은 늘 '홍해의 갈림길' 같다. 날 위해 갈라졌다고 즐거운 착각을 한다. 병가 마치고 나간 첫날, 수국이 피기 시작한 출근길이다.




권력이라면 태생적으로 싫어하는지라 별 것 아닌 작은 직도 도망 다녔건만 올해는 팔자에 없는 보직을 맡아 직장에서 내 위치 생경했다. 게다가 이번 3학년은 처음 만나는 아이들이라 데면데면. 선택형 교육과정이 강화되다 보니 입시 과목도 두 개를 맡아 한 주가 정신없이 르곤 했다. 그렇게 폭풍 같던 3월 한 달이 가고 119에 실려간 그 길로 병가를 내는 바람에 익숙해지려나 하는 그나마의 흐름도 뚝 끊겨 버렸다.


삼십 년 구력이라고 다시  첫날부터 언제 쉬었냐는 바로 직장 복귀가 되는 나지만, 내가 없는 동안 젊고 예쁜 기간제 선생님이 대신 수업을 해 주었던 아이들 입장에선 이제 고역이지 말입니다 소리가 절로 나오겠다. 다시 수업을 시작하자니 정도 설익었고 누가 누군지 여태 모르겠다. 물론 나도 수업 몇 번에 저 이름을 다 외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 해석시켜 볼까?"

"샘, 찬욱이 시키지요!"

"넌 누구야?"

"종민인데요."

"그래. 그럼 종민이 니가 해."

'%^$*(&%$#@'

옆에 녀석 고소해서 낄낄대고 까분다.

"옆에서 웃는 니는 누고?"

딴 녀석들이 재빨리 말해준다.

"준선데요. 이준서요."

"준서? 그럼 다음 꺼는 준서가 한다."

준서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벙한 표정에 애들이 쳐다 보고, 돌아보고, 한 마디씩 놀리거나 그 틈으 웃어 댄다.


앞 못에 든 고기들아 네 와 든다 뉘 너를 몰아다가 엿커를 잡히여 든다
북해 청소(北海淸沼) 어디 두고 이 못에 와 든다
들고도 못 나는 정(情)이야 네오 내오 다르랴
                                                                           - 작자 미상


더듬더듬 종민이 읽기 시작했다.

" 고기들아 네...와... 든다 뉘... 너를 몰아다가 여커를...

! 이건 한국말이 아닌데요."

종민얄궂도 진지한 푸념에 실은 일시에 파아ㅡ웃음소리 차 오른다.


'들다', '나다' 같은 말도 아이들은 평소에 쓰지 않아 낯설어한다. 저 의문형을 평서형이라 여기면 시가의 맛도 나지 않고. 어오고 나는 시늉이나 '종민 너는 왜 맨날 자난다?' 한마디를 하면 애들은 눈치채고 나름 현대말로 옮겨 보려고 용을 쓴다.

"네, 니 와 들어왔노? 뉘, 누가 너를 몰아다가 엿거를, 넣거늘 잡혀 들어왔노?"

방언에는 고어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해를 도울 때가 많고 우리 사투리로 읊으면 리끼리 더 공감되서 좋다. 못에 든 고기나 궁녀인 화자나 처지가 같다. 그러면 '동병상련' 쯤은 한두 녀석이 말하게 되어 있다. 너희들도 여기 갇혀 있지만 곧 큰 바다로 훨- 가거라.


  동안 벽하고(!) 의미 있는(!) 수업을 해보겠다고 나를 들볶아 오다가 번아웃이 왔다. 이젠 그냥(?) 수업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게 무엇이 남았는지 모르겠다는 스산함은 여전한데 그래도 선생이라고 내가 제일 즐거울 때는 이런 때구나. 아이들 웃음소리로 환한 교실. 그것이 꽃이라면 식상하달지라도 함박꽃이라 할 테고 그것이 나무라면 녹색으로 여물기 시작하는 초여름 아름드리쯤일 것이. 새살새살 반짝대는 냇물이기도 하겠지, 그것이 물이라면.


점심 먹고 한 바퀴 할까 중앙 현관문을 여니 요 며칠 이른 더위, 두터운 훈기가 훅 끼쳐온다. 정오가 지나 달아오르는 더위가 오늘은 싫지 않다. 청량. 그것은 역시 마음에서 온다.



오늘 아침엔 수국이 이렇게나 벙글고 있다







*작년에 복직하고 이 길을 처음 발견한 날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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